“장성택 건들지 마” 중국의 최후통첩 묵살
2013년 9월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북한 정권수립 65주년 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왼쪽부터). 장성택은 이로부터 약 석 달 후 최후를 맞았다. 연합뉴스
장성택 처형 이전인 2013년 12월 초, 이전에 이미 필자는 북한의 복수의 고위급 소식통들로부터 그의 숙청과 관련한 일부 의심되는 정황들을 적지 않게 확보한 바 있다. 이로 인하여 이미 2012년 11월 출판한 <김정일의 유서와 김정은의 미래>(비젼원)라는 필자의 책에 관련 정황들을 확보했었기에 장성택의 숙청을 예견했다.
그리고 12월 중순 장성택 처형 이후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소식통들의 정보를 종합한 것에 따르면, 장성택 숙청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데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물론 이는 이미 최고지도부가 장성택 숙청을 결정한 이후 정해진 길을 가기 위한 하나의 명분에 불과했지만.
이 일은 2013년 2월 말부터 시작된다. 조직지도부의 지도를 받는 한 중앙기관 담당부서의 국가안전보위부 인사가 중국 현지에서 돈을 물 쓰듯 하는 북한 인사를 발견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해당 인사는 그 문제의 인물이 장수길 승리무역총회사(일명 54부 회사) 총사장의 운전기사 겸 부관임을 알게 됐다. 장수길은 당 행정부 부부장을 겸직하고 있는 장성택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었다. 뭔가 수상함을 눈치 챈 현지 국가안전보위부 인사는 곧바로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을 통해 김정은과 김경희의 비준을 받아 내사에 착수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내사를 통해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적발했다. 장수길이 이끄는 회사가 중국 현지에서 약 3000만 달러의 빚을 안고 있었던 것. 이미 이 회사에 돈을 빌려준 중국의 채권자들은 상환 기일을 넘기자 빚 독촉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한 해당 회사가 유치한 해외자금 상당액을 착복한 것도 모자라 북한 당 행정부 산하 하급기관 관료로부터도 여러 명목들로 많은 뇌물을 착복한 사실을 밝혀냈다. 물론 이러한 비행은 장성택의 얼굴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장수길, 리용하
앞서 소식통의 정보를 입수한 비슷한 시기, 또 다른 내부 소식통으로부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해당 소식통에 따르면, 장성택 측근들의 여러 비행 정보를 입수한 김정은과 김경희는 당 행정부는 물론 장성택이 관할하고 있는 체육지도위원회를 대상으로 특별조사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 특별조사 지시는 그해 9월께 있었다. 이는 조직지도부 명의였다. 국가보위부 종합작전지도국(1국) 국장이 극비리에 조직지도부 직속 중앙당 담당 안전보위부와 호위사령부 보위부가 극비리에 TF팀(상무그룹)을 만들어 진행했다. 여기에는 인민보안성과 검찰과 같은 북한 내 또 다른 검열기관의 선발된 일부 팀원들도 적극 협조했다.
알려졌다시피, 장성택의 최측근인 장수길과 리용하는 2013년 11월, 장성택에 앞서 먼저 처형됐다. 이는 북한의 고위급 소식통 두 명이 전한 약 10개월 동안 장성택과 그 측근들이 제거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이 대략적인 중심 줄기라면, 그 줄기 사이사이엔 더욱 복잡한 이야기가 얽혀있다.
일단 김정은이 가동하기 시작한 이 죽음의 프로세스에 중국 정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2013년 5월, 김정은 시대 최고 실세 중 한 명인 최룡해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앞서 장성택이 풀지 못한 중국의 비자금 동결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이때 우리 정부와 언론은 ‘왜 그동안 대중관계를 맡아온 장성택 대신, 최룡해가 나섰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무수한 추측이 난무했었지만, 당시만 해도 마땅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장성택은 이미 앞서의 이유 때문에 북한을 대표하는 대중 파트너로서 위치를 확실하게 잃은 상황이었다.
최룡해는 방중 당시 중국 정부에 동결 자금 해제를 요청했다. 여기에 그간 중국이 지불하지 않은 북한의 수출 물자에 대한 대금 결제를 요구했다. 한편 김정일이 사망한 이후 최측근들과 충성계층에 대해 ‘당근’을 통해 불안한 자신의 안보적 입지를 다져야 하는 김정은은 당시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그 절박함 때문에 최룡해가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오히려 김정은의 뜻을 받든 최룡해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 절대적으로 반하는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대해 깊은 불만(실제로는 자신들에게 중요 정치군사적 행위를 먼저 알리지 않는 제멋대로의 김정은 정권, 북중동맹 배신에 대한 앙갚음)을 안고 있었으며, 더군다나 자신들의 절대적 파트너였던 장성택을 제거하려는 김정은의 심산을 이미 자국 대북정보원들을 통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알 만한 핵심 권력계층 내부 인사의 정보에 따르면, 중국은 북한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자기들이 아는 정보를 통해 추가적 제재와 위협을 가했다는 후문이다. 중국 관할 내 동결된 비자금 외에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친북 성향의 동남아 국가(이들 국가 금융은 이미 중국 상권에 포함)들에 분할되어 있는 김정일의 비자금을 국제사회(미국을 염두)에 공개하겠다고 압박을 가했던 것. 국제사회 공개는 곧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 유엔의 추가적인 북한 비자금 동결을 뜻하는 셈이었다.
당 정치국 확대회의 맨 앞자리에 앉아 있다가 요원 두 명에게 비참하게 끌려가는 장성택. YTN 뉴스특보 화면 캡처.
이렇듯 중국 내 동결된 북한의 비자금과 장성택은 미묘하게 얽혀있는 문제였다. 김정은 입장에선 ‘중국 내 동결된 비자금을 장성택 계열이 차지하게 된다면, 더 나아가 이를 중국 정부가 승인하고 지원한다면 북한은 장성택의 나라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 것이 장성택 숙청을 결정하게 된 주요 요인임을 배제할 수 없다.
때문에 중국 정부는 심각한 토의를 거쳐 당시까지 친북성향이 다분했던 장더장(張德江) 전인대 주석 대신 리위안차오(李源潮) 부주석을 2013년 7월 27일 북한의 소위 ‘전승절 60돌’ 행사에 중국 고위급으로는 마지막으로 파견했다. 한국에선 이날을 단순히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일로 취급하고 있지만, 북한 내에서 이날은 사실상 자국의 승전일로 기념하며 손꼽히는 큰 행사로 치러진다. 당시 이 행사에 파견된 리 부주석은 중국공산당 서열 8위에 해당하는 거물로서 표면적으로는 장더장의 서열 3위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중국공산당 조직부장을 거치며 당내 인사와 규율 등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실권자다. 이 자리는 사실상 중국 정부가 북한 김정은 정권에 보내는 최후의 통첩과 같았다.
당시 리 부주석은 김정은에 세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는 핵실험 중단 및 비핵화였고, 둘째는 2013년 말까지 유의미한 개혁개방 조치를 내놓으라는 것. 마지막 셋째가 장성택의 안전보장이었다. 특히 리 부주석은 세 번째 요구사항에 대해 “만약 장성택이 다치면, 앞으로 북중 관계는 나빠질 수밖에 없으며 당 차원의 외교적 관계도 보장하지 못한다”고 공식적으로, 거의 내정간섭에 준하는 단호한 경고성 요구였다고 내부 소식통은 전했다.
하지만 북한과 김정은 입장에서 이러한 중국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의 거물 리 부주석의 경고를 빗댄 중국 최고지도부의 견해라 할지라도 말이다. 김정은 입장에서 비자금 문제와 얽혀있는 장성택의 견제도 그렇지만, 특히 비핵화는 곧 체제의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버지 김정일의 절대적 유훈이기도 했다. 결국 북한 김정은 정권은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의 경고를 무시했다.
이 시기(7월경)가 되어서야 장성택은 자신 앞에 드리운 숙청의 칼날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장성택은 자신의 제거를 허락한 아내 김경희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고위급 소식통에 따르면, 이 시기 장성택은 김경희와 자신의 숙청 관련 문제를 두고 수차례에 걸쳐 싸우고 마지막엔 애원도 했다고 한다. 허나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2013년 11월 초 장성택의 사업권이 전격적으로 정지됐다. 그리고 앞서 밝혔듯 그의 수족에 해당했던 장수길과 리용하, 행정부 부부장급 인사 두 명이 먼저 처형됐다. 비슷한 시기 조직 비리의 단초를 제공했던 장수길의 운전기사도 다른 곳에서 황천길에 올랐다. 살아남은 건 그를 배신한 심복 지재룡 주중대사 뿐이었다.
2013년 12월 9일, 북한 당국은 장성택의 실각을 공식화했다. 당시 <로동신문>은 그의 실각 이유에 대해 ‘당과 수령을 받드는 척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동상이몽, 양봉음위하는 종파적 행위를 일삼았다’며 ‘또한 장성택은 당과 수령의 높은 정치적 신임에 의하여 당과 국가의 책임적인 위치에 등용되었지만 인간의 초보적인 도덕의리와 양심마저 저버리고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천세만세 높이 받들어 모시기 위한 사업을 외면했으며 각방으로 방해하는 배신행위를 감행하였다’고 밝혔다. 이는 수령에 대한 반역죄를 의미했다.
당시 조선중앙TV는 이 보도와 함께 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맨 앞자리에 앉아 있다가 요원 두 명에게 비참하게 끌려가는 장성택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나흘 뒤인 2013년 12월 13일 북한 당국은 공식적으로 장성택을 처형했다고 공개했다.
김정은은 장성택 처형을 공식화한 이후 대대적인 후속조치에 나선다. 북한 당국은 2015년 초까지 당 국제부, 무역부, 국가안전보위부 및 보위사령부(현재 인민군 보위국) 소속으로 중국을 비롯해 해외에 파견돼 있는 장성택 세력 인사들의 숙청작업에 돌입했다. 이에 희생된 인원만 1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절대적 친중 세력으로 대변되는 이들 장성택 세력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숙청 작업에 중국 당국은 적잖게 화가 났다.
김정은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간 승리무역총회사 등 장성택 일파가 이끌었던 무역회사가 중국에 진 빚을 일괄적으로 상환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중국과의 채무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대중국 아첨을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회는 이미 지나쳐 버렸고 어차피 체제유지와 관련되는 문제라 타협할 사안이 아니었다.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필자 이윤걸은? |
둘째 누이 김춘송 해외 파견 내막 김정남 ‘압박카드’ 활용 장성택 처형 직후 북한 로열패밀리 안에서 유의미한 변화도 목격됐다. 가장 주목받은 인사는 김정은의 배다른 둘째 누이이자 김설송의 동복 여동생인 김춘송이다. 2014년 2월 당시 내부 정보에 따르면, 김정은은 누이 김춘송을 해외로 파견 조치했다고 한다. 김춘송은 1975년 생으로 김설송의 바로 밑 여동생이라는 점 외에는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장성택 처형 이후 극도로 약화된 북한의 해외 자금 공작활동을 강화하고자 하는 조치로 추측된다. 현재 북한 로열패밀리 중에서는 둘째형 김정철과 김정남이 이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다만 김정은 입장에선 자신과 다소 거리가 멀고 장성택과 보다 가까웠던 김정남을 압박하고 더 나아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차원에서 김춘송 카드를 꺼냈을 개연성이 높다. [걸·한] |
장성택 생존설의 실체 사형 집행 목격담 없어 감금조치 가능성 ‘솔솔’ 북한 당국은 장성택의 처형을 공식화했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무엇보다 북한 당국의 공식화와는 별개로 이를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고위급 소식통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 실제 목격담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처형 방식을 두고 남한 내에서는 극도의 혼선을 빚고 있다. 남편 장성택의 제거를 용인한 김경희는 실제 마지막까지 그의 ‘처형’을 두고는 심히 고민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북한 당국이 김경희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처형의 공식화와는 별개로 지역 특각(별장)에 감금 조치를 내렸을 가능성도 북한 내부에선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1970년대 실세로 통했던 김일성의 두 번째 부인 김성애 역시 숙청 뒤 한평생 감금 생활을 한 경우다. 심지어 최근엔 장성택의 생일이었던 지난 1월, 김경희와 장성택이 만났다는 정보도 흘러나오고 있다. 국제적 정세를 놓고 볼 때, 북한 당국은 중국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장성택의 안전보장을 요구한 중국의 요구를 두고 북한 당국과 김정은도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북한에 대한 보복조치를 시사했던 중국도 현재까지는 별 다른 움직임이 없다. 장성택 생존 가능성이 제기되는 또 다른 이유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첩보 수준과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는 추측에 불과하다. 다만 그의 처형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바 없는 현재 시점에서는 의문부호가 남을 수밖에 없다. [걸·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