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수법 적발, 누군가 떨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 서초경찰서는 ‘본태성 고혈압’을 악용해 현역 복무를 피한 연예인 두 명을 병역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이번 병역비리에 연루된 연예인은 유명 뮤직비디오 감독 겸 광고모델 김 아무개 씨(27)와 가수 원 아무개 씨(30). 또한 연예인은 아니지만 영상제작자 김 아무개 씨도 함께 입건됐는데 이들 셋은 평소 친분이 남다른 사이였다고 한다.
이들의 입건과 동시에 ‘본태성 고혈압’이라는 질병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서초경찰서 강력 2반 관계자에 의하면 현역 판정을 받았던 이들이 지난 해 4월 재검에서 ‘본태성 고혈압’으로 공익근무 판정을 받았는데 수사 결과 실제 ‘본태성 고혈압’을 앓고 있는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혈압을 조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위적인 혈압 조절을 위해 신체검사 전날 밤을 새운 뒤 커피를 많이 마시고 괄약근에 힘을 주는 방식 등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들이 이런 방식을 알게 된 계기는 인터넷 카페 ‘병역 기피를 위한 모임’을 통해서였다. 지난해 1월 해당 카페를 통해 알게 된 브로커 A 씨에게 각각 200만 원을 준 뒤 ‘본태성 고혈압’으로 판정받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건네받은 뒤 훈련까지 받았다.
병무청 관계자에 의하면 ‘본태성 고혈압’을 악용한 방식의 병역 기피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병역을 기피한 이들이 이미 몇 차례 사법기관에 적발됐다는 것. 다만 연예인이 적발된 경우가 처음일 뿐이다.
결정적인 구멍은 병무청의 신체검사 시스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체검사에서 고혈압 의심 판정만 받으면 병무청은 지정병원에서 24시간 동안 혈압검사를 받도록 하는데 이 과정을 감시하거나 검증하는 장치가 없었던 부분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결국 병무청보다 허술한 지정병원에서 24시간 동안 이뤄지는 검사만 잘 통과하면 현역을 피할 수 있었던 것. 이를 위해 몇 달씩 연습하고 막판엔 아예 합숙까지 하면서 인위적인 혈압 조정 방식을 체득한 뒤 지정병원을 찾아 ‘본태성 고혈압’ 판정을 받아낸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에 적발된 연예인 두 명 역시 합숙까지 강행하며 신체검사를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병무청은 얼마 전부터 이 같은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해 ‘본태성 고혈압’ 판정을 받은 이들을 대상으로 불시 재검을 실시하고 있다.
본태성 고혈압을 악용한 병역비리 실태가 세간에 물의를 빚은 것은 지난 2월이었다. 검찰 수사를 통해 전·현직 축구선수 90여 명이 어깨 탈구로 인한 어깨수술을 이용해 병역면제를 받았음이 밝혀지면서 ‘본태성 고혈압’을 악용한 방식의 실체까지 드러난 것. 이번에 적발된 연예인 두 명은 이보다 먼저인 지난해 4월 ‘본태성 고혈압’으로 공익 판정을 받았으나 곧바로 고혈압 치료를 중단한 것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경찰 수사는 도주 중인 브로커 A 씨를 검거하는 방향으로 집중되고 있다. 이번 수사는 브로커가 아닌 해당 연예인을 중심으로 이뤄져 브로커 A 씨를 통해 유사한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한 이들이 더 있는지 여부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담당 형사는 “브로커 A 씨를 통해 병역을 기피한 이들이 더 있을 것으로 보여 그를 검거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면서 “또 다른 연예인이 추가적으로 드러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다만 사구체신염을 통한 조직적인 병역 기피 사건 당시보다는 파급력이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소속사까지 연루된 조직적인 병역 기피가 아닌 친분 있는 연예인 몇몇이 개인적으로 브로커 A 씨를 만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입건된 이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 연예인 대부분이 병역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음을 감안할 때 가까운 연예인들이 이들의 소개로 브로커 A 씨를 만났을 가능성까지는 배제할 수 없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20대 후반의 한 남자 연예인은 “정확히는 몰랐지만 고혈압이라 속여 병역을 면제받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바 있다”면서 “입대를 앞둔 남자 연예인은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그런 정보에 훤하다. 나도 그 카페에 갔던 기억이 있는데 실제 그런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한 연예인이 있다니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00년대 초반엔 다한증을 위장한 신경절제술이 병역 기피를 위한 주된 수법으로 악용됐고 이후 사구체신염, 그리고 이번엔 본태성 고혈압이 등장했다.
이로써 모든 병역 기피 수단이 근절된 것은 아니다. 무언가 또 다른 질병을 악용한 병역 기피 방식이 등장할 가능성, 아니 이미 암암리에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사안이 불거질 때마다 연예인들이 연루되고 있다는 부분이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