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아, 차라리 테이프 가져가렴’
안기부 X파일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는 지난 7월27일 옛 안기부 불법도청조직인 ‘미림’의 전 팀장 공운영씨 집에서 2백74개의 도청테이프를 찾아냈다. 과거 우리나라 정치권과 재벌, 언론계, 검찰, 관료들의 추악한 뒷거래가 망라돼 있을 도청테이프의 내용은 온 국민의 관심사이자 특종을 노리는 모든 언론사의 매력적인 먹잇감이다.
그러나 바로 전 주 홍석현 주미대사와 이학수 삼성 부회장 간의 밀담이 담긴 도청테이프 단 한 개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전국이 충격에 휩싸였던 것을 감안하면 2백74개 테이프의 내용이 유출됐을 때의 파괴력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에 검찰은 X파일에 대한 수사보다도 내용을 알고 싶어 하는 국민여론과 언론의 공세를 막아내는 ‘보안투쟁’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판국이다.
검찰은 ‘호시탐탐’ 테이프를 노리는 기자들과 정치권, 재계 등에 대한 초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비밀은 새나가기 쉬운 법. 먼저 수사에 참여하는 검사나 수사관들의 수를 최소화하고 있다. 주임검사를 비롯해 2~3명 정도만 X파일의 내용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있고 이들로부터는 “테이프의 내용과 수사 상황을 절대 누설하지 않겠다”는 ‘보안각서’까지 제출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X파일 수사 결과에 대한 검찰 내 보고라인도 최소화하고 있다. 우선 보고라인 자체가 ‘보안사안’이다. 일반적으로 서울중앙지검 공안부의 중요 수사 내용은 주임검사-부장검사-2차장검사-서울중앙지검장-대검 공안과장-대검 공안기획관-대검 공안부장-대검 차장-검찰총장 순으로 보고된다. 그러나 X파일 수사에서 보고라인은 대검에서부터 ‘안갯속’에 가려져 있다.
대검 공안부의 간부들은 ‘서울중앙지검에서 보고를 받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조차 딴소리를 하며 외면하고 있다. 한술 더 떠 ‘김종빈 검찰총장이 테이프 내용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지 않기로 했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우선은 기자들의 집요한 취재를 피해보자는 의도로 보인다. 또 테이프에 등장하는 정치인이나 기업인, 관료들이 아직도 상당수 현직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이들의 추악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경계와 불신의 대상으로 찍힐 수 있다는 이유도 커 보인다.
검찰은 또 수사 진행상황에 대한 브리핑도 오로지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 한 명으로 일원화해 수사팀에 대한 기자들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보통 검찰에서 큰 수사가 벌어질 때는 담당 차장검사가 공식 브리핑을 하더라도 담당 부장검사가 기자들을 만나 기사작성에 도움이 될 만한 ‘팁’을 주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X파일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장은 ‘기자들과 일체 어떠한 만남도 갖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아예 방문을 걸어 잠가 놓고 있다.
수사 초기 기자들은 공안2부장 방을 찾아가면 문밖에서 여직원으로부터 “부장님이 만날 수 없다고 한다”는 매몰찬 대답만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고, 최근 들어서는 아예 찾아갈 생각도 않는다고 한다.
매일 오전 10시에 있는 2차장검사의 정례브리핑도 지극히 ‘건조하게’ 진행된다. 검찰이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는 사실만 간략히 밝히고 기자들이 수사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우회적인 설명도 최소화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예민한 질문이 나올 때면 예외없이 “말할 수 없다”, “확인해 줄 수 없다”로 잘라 버린다. 그러다 보니 서울중앙지검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는 “X파일 수사 기사는 2차장 ‘입’ 하나에 좌우된다”는 자조 섞인 얘기들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검찰이 기자들의 취재를 철두철미하게 통제함에 따라 기본적인 사실 관계조차 엇갈리는 언론보도들이 난무하고 있다. 실제 얼마 전 모 유력 일간지에는 ‘검찰이 이미 2백74개 테이프 내용에 대한 모든 분석을 마쳤다’는 기사가 났고 다른 신문에는 ‘검찰이 테이프 내용에 대한 분석에 착수도 안했다’는 내용이 보도되기도 했다.
물론 검찰은 어느 보도가 맞는지 확인해 주지 않았다. 테이프 내용을 분석했는지 여부조차 ‘보안’인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혹시 자신들의 얘기가 테이프에 들어있을지 노심초사하는 정치인들과 재벌도 검찰 주변에서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검찰은 언론 외에도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열고 싶어 하는 국민여론과 시민단체들을 상대로도 ‘보안투쟁’을 벌이고 있다.
X파일 사건을 검찰에 고발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도 검찰이 현재 확보한 2백74개 테이프 내용을 그대로 공개하라고 요구하진 않는다. 이는 명백히 현행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어서 아무리 국민여론이 비등해도 법을 집행하는 국가기관인 검찰에 법을 어기라고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은 검찰이 테이프의 내용 중 범죄 혐의를 철저히 수사해 단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의 요구는 ‘내용 공개’ 문제가 철저한 수사와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에게 공개는 물론 수사도 엄청난 부담이다. 테이프에 들어 있는 범죄 혐의 중 이미 상당부분은 공소시효가 지났고, 설령 시효가 남아 있더라도 워낙 오래전 일이라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검찰은 공개와 수사를 요구하는 국민여론과 시민단체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법리 싸움’을 통해 대응하고 있다. “불법도청된 자료는 법정 증거는 물론 수사의 단초로도 사용할 수 없다”는 이른바 ‘독수독과’(毒樹毒果:독이 있는 나무의 열매도 독이 있다는 뜻) 이론을 내세우는 방식이다.
검찰은 이를 위해 서울중앙지검 공안부의 검사들은 물론, 대검 공안부의 연구관 검사들도 총동원해 법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테이프의 내용 공개와 수사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검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X파일의 내용이 영원히 어둠속에 묻힐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일단 테이프의 내용을 들어본 사람들이 있는 한 비밀이 샐 위험은 상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정치권에서는 이미 테이프 내용 공개를 골자로 하는 특별법 제정과 전면 수사를 위한 특검 도입에 대한 논의가 상당부분 진척되고 있다. 지난 5일 국가정보원이 ‘DJ정부 시절에도 불법도청이 있었다’는 자체 조사결과를 발표함에 따라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한 철저한 진상규명 요구는 더욱 힘을 받을 전망이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검찰이 갖고 있는 테이프들은 제3의 위원회에 넘어가게 되고, 위원회는 내용을 분석한 뒤 공개할 수 있는 부분은 공개하고 명백한 범죄 사실은 검찰에 수사의뢰를 하게 된다. 오히려 검찰에게는 ‘애물단지’를 털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보인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