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정권에서 많이 활용한 것 같다더라”
▲ 지난 4일 안기부 불법 도청 X파일 사건의 핵심인물인 전 미림팀장 공운영씨가 자해소동 후 분당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나서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공씨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 직전까지도 쏟아지는 취재진의 질문에 “큰 누를 범해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말만 할 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담담했고, 앙다문 입은 아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던질 자세가 되어 있다는 분위기였다. 이번 파문의 핵심인 공씨의 속내는 과연 무엇일까.
현재 공씨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안기부 전 동료였던 임아무개씨(58)에게 극심한 배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문제의 도청 자료들을 공씨 자신이 끝까지 갖고 있으려 한 최종 목적은 언젠가는 그 내용들을 책으로 묶어 국내 정치의 한 역사로 남기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공씨는 자신이 1999년 국정원 이건모 전 감찰실장에 자료들을 반납했지만, 결국 그것이 DJ정권 실세들에 의해 악용된 것으로 믿고 있다.
기자는 이 같은 사실을 공씨와 가장 흉허물없이 속내를 주고받을 수 있는 한 최측근 인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번 사태의 핵심 인물인 공씨는 자해 소동을 벌이기 직전인 7월26일 자술서를 공개했다. 하지만 그의 자술서는 더욱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열흘 동안 입원해 있던 분당 서울대병원 병실 앞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취재진과 접근을 막는 검찰 관계자의 대치 속에서 그 짧고도 긴 시간 동안 병실 안의 공씨는 무슨 생각과 결심을 했던 걸까.
기자는 공씨의 병실을 유난히 자주 드나드는 한 인사를 주목했다. 그는 공씨와 호형호제하며 25년간 끈끈한 인연을 맺어온 사업가 문아무개씨였다. 그는 이번 사건으로 현재 잠적중인 임씨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현재도 공씨와 강남의 사무실을 함께 임대해서 쓰고 있는, 그야말로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최측근으로 알려졌다. 그는 현재 한 체육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때 영화 사업과 함께 직접 감독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씨는 여러 번의 전화 접촉과 함께 사무실을 직접 찾은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무조건 (언론을) 피하기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닌 것 같다”며 조심스레 공씨의 심경을 전했다.
─공씨가 자해소동을 벌인 뒤 깨어나서 보인 첫 반응은 무엇이었나.
▲첫 마디가 ‘참 창피하다’는 것이었다. 형님(공씨)은 정말 자신이 죽음으로 모든 것을 다 떠안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죽는 것도 참 마음대로 안 되더라며 한숨을 쉬었다.
또한 병원에서 뉴스를 보면서 박인회씨(윌리엄 박)와 그의 변호인인 강신옥 변호사가 하는 말을 듣고는 ‘저 나쁜 XX 봐라’라며 흥분했다. 그는 ‘오냐 잘 걸렸다. 내가 정말 죽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자해소동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초리가 있다.
▲엄살이라는 말도 있고, 쇼를 한다는 얘기도 있다고 들었다. 그것은 정말 형님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평소엔 색시처럼 얌전한 분이지만 해병대 출신답게 자존심도 강하고 욱 하는 성격이 있다.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고 그었는데 아무리 세게 서너 차례 계속 그어대도 힘줄이 안 나가더라고 했다. 결국 손목 힘이 빠졌고 물에 몸을 던지며 의식을 잃은 것이다.
─그렇다면 공씨는 현재 박씨측이 내놓는 주장이 모두 사실과 다르다고 보는 건가.
▲당연하다. 그리고 나도 박씨는 잘 모르지만, 임씨는 잘 안다(임씨는 공씨와 함께 국정원에서 근무한 동갑내기로 무척 절친한 친구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99년 3월 국정원에서 함께 직권면직된 바 있다. 임씨가 공씨에게 박씨를 소개한 장본인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그는 종적을 감춘 상태다). 그 양반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나쁜 사람이다. 지금 형님도 임씨에게 가슴 사무치는 배신감을 갖고 있다. ‘일생일대 친구 하나 잘못 둔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가슴을 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 배신감을 느낀다는 건가.
▲그런 테이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임씨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형님은 비록 자기 자신이 혹여 불이익이라도 당할까봐 방어 수단으로 자료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미끼로 무엇을 해볼 생각은 정말 전혀 없었다.
그 자료를 미끼로 자신의 복직을 요구하는 등 이용하고자 한 이는 임씨였다. 그리고 거기에 박씨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박지원 전 장관 등을 만난 것이다. 형님은 친한 친구인 임씨가 부탁하자 어쩔 수 없이 삼성에 관련된 자료 일부만 준 것뿐이다. 그런데 그게 결과적으로 이런 엄청난 파장을 초래한 것이다. 뒤늦게 그런 협박 건을 안 형님이 당시 기겁을 해서 막으려고 전전긍긍했다.
─공씨는 99년 국정원의 이건모 전 감찰실장에게 테이프와 자료를 돌려줄 때도 결과적으로 모두 복사해서 본인이 갖고 있었다. 무슨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초 안기부(현 국정원)에서 테이프를 갖고 나오게 된 것이나, 그 이후 복사까지 하면서 갖고 있으려 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이미 밝혔듯이 자신이 혹시 불이익을 당할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목적인 두 번째 이유는 따로 있다. 나중에 언젠가는 이 내용들을 정리해서 공개하려 한 거다. 학회나 혹은 언론계 원로 등에 이 자료들을 모두 맡겨서 이런 추악한 과거를 우리 정치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야겠다는 심정도 갖고 있었다.
─검찰의 압수수색이 뻔한 상황인데 그 테이프를 집에 그대로 보관한 이유는.
▲역시 같은 맥락이다. 형님은 당연히 자신이 죽은 이후 그 테이프가 압수수색 등을 통해서 모두 드러날 것으로 예상했다. 안기부 생활만 30년을 넘게 한 사람인데 그걸 모르겠는가. ‘나는 이렇게 죽음으로써 입을 열지 않고 가니, 너희들이 보고 너희들이 알아서 판단해라’ 하는 심정인 셈이다. 그렇게 하면 어차피 다 밝혀질 것 아닌가.
─그렇다면 공씨는 지금 현재도 이 테이프의 내용이 모두 밝혀져야 한다는 입장인가.
▲그렇게 알고 있다. 다 공개할 수 있으면 공개하는 게 옳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형님도 필요하면 재판할 때 나가서 있는 그대로 모두 진술하겠다고 하더라. 죽음까지 각오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 뭘 감추겠나. 평소에도 그런 엄청난 역사적 사실들을 본인 혼자만 알고, 담아가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던 것 같다.
─변호인인 서성건 변호사는 당시 실제 테이프 수가 8백여 개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머지의 행방은 어떻게 되는가. 정말 더 이상 가진 것이 없나.
▲그렇다. 한 8백여 개 되는데, 그 중에서 형님이 2백여 개쯤 갖고 나왔다는 것 아닌가. 나머지는 그 안에서 다 소각하고. 중요한 것만 갖고 나왔다고 하더라. 아마 어느 정도 그(안기부) 안에서 이미 A급, B급, C급 등으로 선별해 놓았던 듯하다.
나는 형님의 우직함과 진실성을 믿는다. 박씨나 임씨처럼 그런 얕은 수를 쓰는 분이 아니다. 자기는 이제 모든 걸 다 던졌으니까 이제 정말 없다고 하더라.
─공씨도 99년 당시 이 전 실장에게 반납한 테이프가 전량 다 소각됐다고 믿나. 혹시 거기서 또 복사되거나 유출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것까지 형님이 알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반납하라고 해서 반납했고, 전량 다 소각했다고 하니 믿을 수 밖에….
형님이 99년 그 자료를 반납하기 전 복사해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데, 잘못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로서는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뭔가’가 있었다. 자신이 또 당할 수 있다는 거다. 사실 박지원 전 장관이나 천용택 전 국정원장이나 좀… 그 자료를 다 이용해 먹은 게 아닌가. 실제 DJ 정권에서 그것을 갖고 활용을 많이 했다는 것 같더라. 혹시 그게 문제라도 되면 자칫하면 자신만 또 당할 수도 있다. 형님은 오랜 안기부 생활로 인해 그런 방어 본능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25년 지기’라고 말했는데, 이번 일이 터지기 전에도 공씨가 미림팀에서 그와 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대충은 알고 있었다. 깊이는 몰라도. 형님이 정치 담당했고, 감찰실에서도 근무했고… (불법도청) 자료에 대해서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미림팀이란 이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사석에서 좀 더 구체적인 얘기도 했을 법한데. 녹취록 내용에 대해서도….
▲형님이 말을 막 하는 성격은 아니다. 내용에 대해서는… ‘국가적으로 여러 가지 나쁜 상황, 뭐 정치, 그런 안 좋은 얘기들이다’ 그런 식으로만 얘기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건 내 사견이지만 며칠 전 YS가 제주에서 한 발언을 보니까 상당히 의미심장한 뉘앙스가 풍겨지더라. ‘하나회를 내가 없애서 결국 DJ도 노(노무현 대통령)도 대통령이 된 게 아니냐’하는 부분이다. 결국 YS가 무슨 약점으로 하나회를 다 때려잡았겠는가. 그런 자료가 있으니까 다 (하나회도) 잡았고….
─공씨는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겠다는 입장인가.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모든 진실을 다 밝혀야 한다는 입장이다. 녹취 내용에 대해서도 공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번 일이 삼성의 이해관계에 따라, 또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왜곡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서 다 진실을 밝히겠다고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나서는 죄값이 있다면 받고 조용히 건강이나 챙겨야 하지 않겠나. 이제 사업이고 뭐고 또 나설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