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DJ 차기 보장하며 도움 부탁”
▲ 박철언 전 의원은 지난 90년 3당합당을 위해 YS와 자주 만났고 최근 당시 막후에서 벌어진 일을 폭로해 파문이 일고 있다. 사진은 지난 90년 1월22일 3당합당을 발표하는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세 사람. | ||
3당 합당을 위해 YS가 민정당과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을 당시 노무현 의원은 양 김씨의 통합(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의 합당)을 위한 통합추진위원회 활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당연히 3당 합당을 준비하던 YS에게 노 의원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3당 통합을 위해 1988년 9월21일 상도동에서 YS를 독대했다. YS는 ‘나는 김대중과 달리 보수의 길을 걷는다’고 했다. 보수대연합 운을 떼자 YS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신뢰의 감정을 느낀다’며 ‘김대중은 믿을 수 없고 좌경화의 우려가 있다’고 했다.
1988년 12월28일 밤 9시 상도동 YS 자택에서 김영삼 총재를 만났다. 나는 먼저 대통령의 안부를 전한 뒤 ‘큰 선에서 자유민주 체제의 수호라는 목표를 가지고 공동의 길을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5공 비리 정국과 중간평가 문제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또 노사 분규에 개입하여 선동하고 있는 듯 비치는 노무현 의원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김영삼 총재는 ‘김대중 총재의 제의로 공화당과 동조하여 추진중이던 3당 사무총장 회담에서 합의한 3당 총재 회담에 반대합니다. 오늘 공개적으로 사무총장을 야단쳤습니다. 김대중이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무현 의원은 오늘 아침 김광일 변호사를 시켜 조금 순화시켰습니다. 오늘 아침 포항에서 불러올려 크게 야단쳤습니다. 재발시에는 당에서 조치하겠으니, 너무 확대해서 문제삼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나는 노 의원의 사법 조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YS에게 그를 자제시켜 사태의 악화를 방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1989년 10월15일 저녁. 3당 합당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상도동 김현철의 아파트에서 만난 김영삼 총재는 민주당 내의 야권 통합 움직임에 신경이 쓰이는지 ‘최형우, 장석화는 못 쓰는 인간입니다. 그 두 사람 이외에는 반대 세력이 없고 노무현은 당을 떠나도 무방합니다. 현 대통령의 임기는 보장합니다’라고 자신의 복안을 털어 놓았다.”
‘중간평가 유보’ 막전막후
노태우 대통령은 1987년 12월 대선에서 임기 중반에 ‘중간 평가를 받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권의 기반이 취약했던 노 대통령으로서는 실제로 받아들이기 힘든 카드였다. 당시 YS, DJ는 노 대통령의 약속 이행을 주장하며 연일 장외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실상은 여당과의 ‘물밑 접촉’을 통해 ‘중간 평가 무기연기’에 합의해 주고 있었음이 이번 회고록을 통해 확인됐다.
“1989년 3월16일 밤 10시. 상도동 김영삼 총재 집 2층 서재에서 김 총재와 마주 앉았다. 이날 나와 김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구국적 차원에서 양당을 합당하기로 합의한다’고 합당에 대해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중간평가를 무기한 연기한다는 데도 합의를 이끌어냈다.
▲ 박철언 전 의원은 지난 97년 김대중 당시 총재가 ‘차기’를 약속하면서까지 도움을 청했다고 회고했다. 사진은 지난 97년 1월 국민회의 자민련 의원총회장에서 얘기하고 있는 두 사람. | ||
김영삼 총재는 낮에는 옥외 군중 집회를 열고 ‘노태우 정권 불신임 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나 나와는 이미 정계 개편에 대해 상당히 깊은 이야기들이 오간 상태였기 때문에 내심으로는 중간평가 유보를 돕고 있었다.”
YS 측근의 DJ에 대한 제보
YS와 DJ는 대표적인 야당 정치지도자였고 오랫동안 같은 당(민주당, 신민당)에 몸담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대통령 후보 단일화 실패로 두 사람은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양측 측근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1989년 4월7일 밤 신라호텔에서 황병태 의원을 만났다. 황 의원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김영삼 총재에게도 일부 쏠리고 있는 공안 정국의 화살을 모두 김대중 총재에게 돌리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황병태는 ‘김대중 총재를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가 알기로는 3월16일, 19일 두 차례에 걸쳐 김대중 총재와 문 목사가 만났습니다. …문 목사가 백기완, 계훈제, 이재오를 만나 방북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는데 모두가 반대해서 안 가기로 약속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김대중 총재를 만나고 나서 전격적으로 방북을 결정했답니다. 아마 돈과 김일성에게 보낼 친서를 전달한 것 같습니다’고 했다.
나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YS측이 이번 기회에 DJ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겠다고 마치 고자질하듯 시시콜콜 정보를 주는 장면에서는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내각제 무산 내막
1990년 여야 3당의 전격적인 합당의 이면에는 ‘내각제 합의’가 있었다. 이 합의를 이끌어 낸 장본인이 바로 박 전 의원이었다. 그러나 내각제를 매개로 한 합의는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서서히 효력을 상실해갔다. 특히 상당수의 민정계 정치인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YS는 자신의 후보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내각제 합의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소련 방문을 앞둔 90년 3월2일 김현철의 아파트에서 YS와 만났다. YS는 ‘내각제 합의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박 장관이 나를 화끈하게 도와주면 수월하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 것이고… 민주계에 특별한 사람도 없고’라며 협조를 요청했다. 나는 ‘반드시 내각제를 해야 한다’고 맞서 YS와 충돌했다.”
▲ 지난 93년 ‘슬롯머신사건’으로 구속, 재판장에 들어서는 박 전 의원. | ||
“1992년 4월19일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라마다르네상스 호텔에서 김복동 의원을 만났다. 김 의원은 ‘노 대통령은 4월8일 YS에게 대권을 주기로 최종 결정했고, 4월9일 (주례 회동에서) YS에게 정식 통고했더니 마룻바닥에서 큰 절을 하였다고 각하가 얘기하더라고 전했다.”
슬롯머신 사건의 뒤안길
1992년 대선에서 국민당의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박 전 의원은 대통령이 된 YS로부터 강한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러던 중 ‘슬롯머신 대부였던 정덕진씨 형제로부터 1990년 10월께 5억원의 돈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게 된 박 전 의원은 1993년 5월22일 전격 구속 수감됐다.
“(구속영장이 청구된 그날 조사실로 찾아온 황태순 보좌관은) 홍준표 검사가 ‘박 의원이 왜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박 의원이 돈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러나 돈을 받았다면 정치자금이 아니었겠냐라고만 해준다면 검찰에서도 선처의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 전 의원은) 1994년 2월1일, 서울구치소 의무과 화장실에서 우연히 정덕진과 마주치게 되었다. 정덕진은 ‘박 의원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시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저도 홍준표의 사기극에 놀아난 피해자입니다. 저도 남자입니다. 2월18일 선고 공판(정덕진에 대한 항소심)이 끝나면 제가 나가든 계속 있든 진실을 밝히겠습니다’라고 했다.
1994년 2월15일, 접견대기실에서 또 정덕진과 마주치게 되었다. 정덕진은 2월18일 선거 공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날 것을 확신하는 듯했다. 정덕진은 ‘제가 석방되면 2~3일 정도 있다가 주위 사람들을 설득해 기자회견이라도 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못 나가게 되면 변호사님을 보내주십시오. 변호사님께 모든 진실을 밝혀 박 의원님의 결백함을 밝혀 드리겠습니다’라고 결연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3월4일 항소심 3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덕진은 법정에서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박 의원님을 마주친 적도 없습니다’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 끝내 양심선언을 하지 못했다.”
97년 DJ의 도움 요청
박 전 의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DJ와 박 전 의원의 관계는 1980년 이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특히 박 전 의원이 자민련의 부총재로 DJP 연합을 이끌어 낼 당시 DJ는 박 전 의원에게 많은 도움을 청했다고 회고록은 적고 있다. 박 전 의원은 DJ가 “이번에 나를 도와주면 다음번에는 박 전 의원이 대권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말을 했다고 밝혔다.
“1989년 1월19일 DJ와 3시간가량 만났다. DJ는 ‘내가 김영삼 총재보다 건강하다. 그는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늙은 것 같다. 나보다 더 늙어 보인다. 내가 이제 65세지만 대통령을 한 텀은 할 수 있는 건강이다’고 했다.
1997년 3월1일 일요일 9시부터 10시30분까지 힐튼호텔 1638호실에서 DJ를 극비리에 만났다. DJ는 정국 흐름과 관련, ‘JP가 YS측에 내각제를 타진했으나 불발되었다’면서 ‘국민회의가 내각제로 당론을 조정하면 후보 단일화 문제는 양보해주어야 순리 아닙니까’라고 운을 떼었다.
이어 나에게 ‘박 의원은 이 나라의 미래, 특히 통일을 위해 꼭 필요한 지도자이니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영·호남의 결합을 통해 국민 대화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박 의원의 지론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상호 존중 정신이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했다.
DJ는 이어 ‘서로 결합하여 다음에는 박 의원이 나라를 맡도록 보장하고 모든 것을 지원할 테니 이번에는 도와주기 바랍니다. 과거 북방정책, 통일 문제에 대해서 박 의원이 하는 일을 내가 마음으로 성원했었습니다’ 하며 과거부터 나를 믿어왔음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