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잠룡 잡아야 ‘호남 자민련’ 탈피
천정배 의원이 신당 창당에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가운데, 안철수 의원 영입에 공을 들이고 있다. ‘천·안’ 연대가 현실화된다면 천정배 신당은 ‘호남의 자민련’을 탈피, 전국 정당의 발판을 만들 수 있다. 일요신문 DB
이를 위해 천 의원은 온건한 진보와 합리적 보수의 ‘중용’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과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오는 10월 풍요롭고 공정한 대한민국을 위한 개혁적 국민정당 추진위원회 구성→12월 창당준비위원회 출범→내년 1월 창당 완료’ 등의 시나리오가 천정배 신당 창당 플랜의 골자다.
하지만 ‘과연’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새정치민주연합 범주류 한 관계자는 “창당대회를 열어야만 진짜 창당”이라며 천 의원의 창당 기자회견을 평가 절하했다. 실제 천정배 신당 창당 기자회견의 하이라이트로 꼽힌 젊은 교수 그룹과 법조인, 스포츠스타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천 의원은 한발 더 나아가 애초 예상과는 달리 ‘여야 기성 정치인’도 함께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단, 전제조건은 있다. 좌우 양극단의 원리주의를 배격하는 ‘중용’ 가치를 지향하는 인사다. 천정배 신당이 거대 양당과 차별화를 꾀하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중용이 무엇인지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간 인물 영입에 난항을 겪은 천정배 신당이 새정치연합 원심력에 따른 반사이익만 좇다가 서둘러 창당 선언을 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천 의원 신당 기자회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명대사인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뿐이다. 천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문 대표가 ‘천 의원과 접점을 찾을 수 있다’고 밝힌 데 대해 “미안한 얘기지만 새정치연합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너나 잘해라’ 이런 말이 생각난다”며 돌직구를 던졌다. 이에 문 대표는 “무례한 발언”이라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양측이 만날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넌 셈이다.
야권 관계자는 “천정배 신당의 노선인 ‘온건한 진보·합리적 보수’를 눈여겨보라”며 “천정배 신당의 인물은 물론, 향후 신당 창당의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노선은 안철수 전 새정치연합 공동대표가 18대 대선 전후로 밝힌 자신의 노선이었다. 또한 2013년 3월 초 민주당과의 합당 직전까지 추진했던 ‘안철수 신당’의 가치였다.
천정배 신당 구상에 안 전 대표가 핵심 상수로 자리 잡은 게 아니냐는 분석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그만큼 야권 발 정계개편에서 안 전 대표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천·안(천정배·안철수)’ 연대가 현실화된다면 천정배 신당은 ‘호남의 자민련(김종필 전 총재의 자유민주연합)’을 탈피, 전국정당의 발판을 만들 수 있다. 그간 정치권 안팎에서 제기된 호남의 천정배, 영남의 안철수, 수도권의 손학규 삼각 편대가 본궤도에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판은 깔렸다. 천 의원과 안 전 대표는 문 대표가 재신임 승부수를 던진 지난 9월 9일 국회에서 배석자 없이 단독 회동했다. 특유의 타이밍 정치로 문 대표 힘을 뺀 것이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비노계 관계자는 이들의 만남을 “신당 추진세력과 미래권력의 연결고리 간 만남”으로 규정했다. 천 의원은 이 자리에서 안 전 대표에게 신당 입당을 권유했다. 이에 안 전 대표는 천 의원에게 새정치연합 복당을 역제안했다. ‘문재인 비토’에는 교집합을 가진 이들이 방법론과 관련해선 ‘신당 창당’, ‘내부 투쟁’ 등으로 나뉜 셈이다.
안 전 대표 측은 이와 관련해 “지금은 원내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국정감사 시기가 아니냐”라며 “당분간 탈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들이 필요에 따라 재회동할 수 있다고 밝힌 만큼, 추석 이후 새정치연합의 원심력을 이용하는 타이밍 정치를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공은 천 의원에게 있다. 뉴 DJ 플랜을 고리로 전국정당 창당에 나선 천 의원은 신당 창당의 성공 요인인 인물·조직·자금에 대한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정풍운동’을 선언한 안 전 대표가 혁신 운동을 펼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인물 구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안 전 대표도 신당 창당 당시 정책네트워크 ‘내일’ 이사장으로 진보진영의 대부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를 영입하며 신당 창당의 동력을 끌어올린 바 있다.
천정배 신당 역시 비슷한 모델을 추구해야 한다. 첫 번째 분기점은 추석 직후가 될 전망이다. 천 의원으로선 오는 1월 창당 완료를 위해 ‘추석 직후’ 5개 시·도당위원회 출범 작업에 착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준영 신당(신민당)과 박주선 신당(새시대민주당), 장세환·유선호 전 의원 등으로 사분오열된 반문(반문재인) 신당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는 복안이다. 이 경우 새정치연합 김한길 전 공동대표를 비롯해 박영선 전 원내대표, 김부겸 전 의원과 김성식 전 새누리당 의원 등이 참여하는 ‘중도성향 제3신당론’의 물꼬가 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신당의 인물영입이 신기루에 불과했을 경우다. 신당 유인책이 없는 상황에서 ‘천정배-안철수’ 연결고리가 완성될 수 있느냐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정세균계 한 관계자는 안 전 대표의 탈당 가능성에 대해 “섣불리 탈당할 수 없을 것”이라며 “사실상 새정치연합을 만든 공동 창업자가 아니냐. 한때 호남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은 안 전 대표가 탈당한다는 것은 곧 정치적 자멸 행위다. 그때보다 호남에서 영향력이 떨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입지가 더욱 좁아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여론조사전문기관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 9월 10일 ‘야권의 정치인 중 김대중·노무현 정신을 잘 계승할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조사에서 안 전 대표는 7%로 4위에 그쳤다. 문 대표가 23%로 1위를 기록했고, 이어 박원순 서울시장(22%), 안희정 충남도지사(12%) 순이었다. 적어도 현재 호남 민심은 문 대표 등 당 주류에 있는 셈이다.
한 정치평론가는 이와 관련해 “그간 천정배 신당이 ‘문재인의 약한 리더십’ 등 야권 내부 분열에 의존했다면, 이제는 진짜 실력을 보여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문재인 재신임 정국에서 드러난 비주류의 약한 결집력을 역이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며 “친노의 연결고리를 치기보다는 중앙위에서 소수였던, 그마저도 행동 통일을 보지 못했던 비노계를 끌어당겨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문 대표가 재신임 투표 제안을 철회한 직후 오찬회동에 모인 ‘민주당의 집권을 위한 모임(민집모)’ 소속 의원은 4명 정도에 불과했다. 호남과 혁신의 키워드로 이들을 묶어야만 문 대표가 추석 이후 단행할 ‘통합·혁신·민생’의 ‘뉴파티(New Party)’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천 의원 측은 추석 이후 1차 영입 대상 공개와 함께 대대적인 프레임 대결에 나설 방침이다. 핵심은 정치혁신과 경제정책이다. 거대 양당 체제 타파를 위한 제도 개혁은 물론, 미국의 유력한 대선 후보인 버니 샌더스(버몬트주) 민주당 상원의원의 ‘99%의 세상’ 슬로건에 버금가는 프레임을 공개할 계획이다. 이른바 ‘아웃사이더의 반란’이다.
현재 천정배 신당 외곽에는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가 추진 중인 <복지국가 정당>이 있다. 지난 4·29 광주 서구을 보궐선거 당시 천 의원을 지원사격한 이들이 대거 포함된 <복지국가 정당>은 ‘광주→목포→순천→제주→대전’ 순으로 지역 조직을 만들었다. 천 의원 측 관계자는 “호남과 국민들은 새로운 정치세력을 원한다”며 “기성 정치권과는 차별화된 정치혁신과 정책으로 거대 양당과 경쟁하겠다. 그러면 친노(친노무현) 패권주의에 염증을 느낀 안 전 대표 등도 큰 바다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