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존심 강한 사이코패스”
‘트렁크 시신 사건’ 용의자 김일곤이 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용의자의 행동은 범죄심리학의 관점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연합뉴스
잔혹하게 훼손된 여성 시신이 처음 발견될 당시, 경찰은 원한 혹은 치정관계에 의한 살인일 것으로 추론했다. 보통의 살인범은 살해 후 시신을 유기하거나 감추기 바쁘고, 원한관계가 있지 않은 이상 불필요하게 시신을 훼손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피해 여성 주 아무개 씨(35)가 김일곤과 일면식도 없는 우발적 범행 대상이라는 점이 밝혀졌을 때 충격은 더했다.
김상균 백석대 법행정경찰학부 교수와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김일곤의 사체훼손의 배경에 ‘성적 동기’가 있을 것으로 지적했다. 김 교수는 “여성에 대한 불만이나 적개심 표출이라기보다는 평소 여성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에서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보인다. 방화 역시 살해 흔적을 없애려한 게 아닌 자신의 성적 행동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도 “본인이 정확히 진술하고 있지 않아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신에 부적절한 접촉을 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언급했다.
김일곤이 검거된 현장.
두 교수는 ‘김일곤이 자존심이 센 인물일 것’이라는 공통적 분석을 내렸다. 자신이 받는 불이익이나 심리적 타격에 굉장히 예민하고, 그 원인을 남에게 돌려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 실제로 김일곤은 오토바이 사고로 척추를 다쳐 장애 6급 판정을 받게 되자 자신의 수술을 맡은 의사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다. 오토바이 접촉사고로 벌금을 물게 된 일 역시 “나는 피해자”라며 판결을 내린 판사와, 사고 관련자인 김 아무개 씨(28)의 이름을 ‘살생부’에 적기도 했다.
김일곤이 평소 정장을 자주 입었던 이유 역시 그의 강한 자존심 때문일 수 있다고 한다. 방화 후 도주하는 모습이 담긴 CC(폐쇄회로)TV에도 정장 차림에 안경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이 찍혔다. 마땅한 직업이 없이 고시원을 전전했던 그의 이력에 비춰봤을 때 다소 이례적인 차림이다. 이런 옷차림 역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 이수정 교수는 “아무 옷이나 입으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남들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 한 행동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상균 교수 역시 “범행 후 의심의 눈길을 피하려 입은 의도일 수도 있다. 평소에도 정장을 자주 입었다면 자신의 허름한 모습을 포장하기 위한 옷차림일 것이다”고 보탰다.
복수극에 숨진 주 씨를 이용하려 했다는 김일곤의 주장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는 경찰 수사 중 원래 살해하려 했던 건 주 씨가 아닌 과거 접촉사고와 관련된 김 씨였다고 자백했다. 숨진 주 씨를 노래방 도우미로 가장해 노래방에서 일하는 김 씨를 불러내려 했다는 것. 하지만 김 씨는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말이 안 된다. 김일곤이 만나자고 하면 다 만났다”며 굳이 여성을 납치해 유인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김일곤의 진술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일반인의 상식에 어긋난다고 해서 거짓진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혹여 사실관계가 틀리더라도 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김 교수는 “‘만성적 거짓말’은 범죄자들의 주된 특징이다. 거짓 진술을 하면 경찰, 언론 등이 그대로 믿고 움직이기에 현 상황을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진실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해 두 전문가의 의견이 엇갈렸다.
김일곤의 행태 중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은 ‘살생부’다. 검거 당시 그의 주머니에서는 28명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발견됐다. 김일곤은 검거 후 일관되게 “복수하고 싶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명단에 포함된 이들은 자신에게 벌금형을 내린 판사,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와 의사 등이다. 특히 노래방에서 일하는 김 씨에 대해서는 더 강한 적개심을 표현했다. 실제 흉기를 들고 김 씨를 찾아가 위협한 적도 있지만, 김 씨 등에게 제압당했다. 이 교수는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한없이 약한 게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다. 김 씨와 실제로 싸우기엔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고, 체격조건 역시 따라주지 않는다. 대신 주변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호전적으로 행동하는 등 약자를 괴롭혔다”고 설명했다.
김일곤이 ‘사이코패스’인지에 대해서는 두 교수의 의견이 일치했다. 사이코패스는 공감능력과 죄책감이 일반인에 비해 결여돼 있고,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보인다. 김 교수는 “전과 22범으로 여러 차례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얻은 학습된 성향일 수 있다. 사이코패스라고 진단하기 위해선 정밀한 검사를 해야 하지만, 후천적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단호하게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연쇄살인범만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교도소 전체 수감자의 4분의 1이 사이코패스라는 분석 결과도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번 사건은 전문가들도 “이례적인 케이스”라고 분석했다. 원한관계가 아닌 범행 대상의 시신을 무차별적으로 훼손했고, 방화를 해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또 석연찮은 이유로 장거리 도주를 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 교수는 “전과가 있기에 ‘이번엔 어떻게든 경찰에 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도주했을 것이다. 그런데 범행 도중 굳이 불필요한 행동을 했다. 보통의 살인범은 시체를 강이나 바다에 버리거나 매장하는 등 흔적을 지우려 한다. 김일곤은 합리적 선택을 할 심리상태가 아니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과거 강호순, 유영철 사건과 비교할 만하다. 강호순의 범행도구는 여성의 스타킹이었다. 유영철은 망치를 이용했다. 망치는 남성의 성기로 상징되는 물건이고 스타킹 역시 성적 의미가 담겨 있다. 약자인 여성을 상대로, 성적 의미를 담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점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