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마라 시끌 “미국 체류 계획중”
▲ 홍석현 주미대사 | ||
온 나라를 뒤집어 놓고 있는 ‘X파일’ 사건의 당사자인 홍 대사의 귀국 여부에 사회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의 귀국이 몰고 올 새로운 파장의 범위를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 ‘불안감’을 더하고 있다.
현재 홍 대사는 귀국과 미국 체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귀국을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모두 만만치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할 상황이기 때문. 직·간접적으로 이번 사건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도 홍 대사의 귀국을 두고 저마다의 셈법을 계산하느라 여념이 없다.
현재 X파일 수사의 흐름은 삼성을 조금씩 비껴가고 있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았다는 전·현직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 파문을 일으키고는 있으나 애초 삼성의 97년 대선자금 로비의혹으로 시작됐던 도청정국은 이미 삼성을 떠나 ‘도청의 불법성 문제’와 ‘국정원의 과거행적’에 주로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홍 대사와 삼성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 게다가 최근 노 대통령이 “97년 대선자금 수사 반대” 입장을 밝힌 이후 삼성측은 숨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홍 대사의 귀국은 이러한 상황을 한순간에 급반전시킬 수 있는 ‘도화선’을 품고 있다.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는 이미 ‘X파일’의 마지막 ‘판도라의 상자’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홍 대사의 귀국 여부는 현재 진행되는 검찰의 수사와는 관련이 없다. 아직 삼성에 대한 검찰수사의 방향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홍 대사가 귀국한다고 해도 당장 달라질 것은 없다. 그리고 이미 또 다른 당사자인 이학수 본부장이 녹취록에 담긴 내용과 관련 조사를 받은 상황이 아닌가. 다만 언론이나 정치권이 홍 대사의 귀국에 대해 과도한 관심과 함께 삼성을 압박해 올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부담이 되고 있다”며 그의 귀국 문제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내비쳤다.
현재 홍 대사는 사표를 제출한 이후에도 여전히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후임대사가 결정되지 않은 데다 오는 8일부터 시작되는 노 대통령의 중남미, 미국 순방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
홍 대사의 한 측근은 “홍 대사가 사의를 표명한 이후 굉장한 충격과 실의에 빠져 지냈다. 다행히 최근 휴가를 다녀온 뒤 조금 편안해진 모습으로 일에 매진하고 있다”고 홍 대사의 근황을 전했다. 문제는 대통령의 순방일정이 끝나고 신임 대사가 임명된 이후 홍 대사가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현재 홍 대사는 귀국과 미국체류 두 가지 갈림길에서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홍 대사의 귀국문제는 본인뿐 아니라 적잖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크고 작은 모습으로 이번 사건에 연관된 사람들은 저마다의 셈법에 따라 홍 전 대사의 귀국 여파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일단 홍 대사는 9월 중순 노 대통령의 중남미 순방 이후 자신의 향후 ‘거취’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사표를 낸 상태지만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의중을 한번은 들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과 홍 대사 두 사람은 오는 9월14~15일 사이에 미국에서 만나게 된다. 미국에서 개최되는 제60차 유엔총회 정상회의에서 홍 대사는 주미대사로서 마지막 활동을 할 계획이고, 노 대통령은 이 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이 만남에서 두 사람이 나누게 될 대화가 결국은 홍 대사의 향후 행보에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홍 대사의 거취는 대통령의 중남미 방문 이후에나 구체화될 것으로 본다”고 말해 이런 관측을 뒷받침했다.
▲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맨 위). 떡값검사 명단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의원(가운데). 홍석현 대사의 매형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 ||
곤란하기는 야당도 마찬가지.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홍 대사가 들어와도 문제고 안 들어와도 문제다. 들어온다면 시끄럽겠지만 사건은 해결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이고 들어오지 않는다면 조용한 가운데 이 논쟁이 계속될 것 아닌가. 어느 쪽도 한나라당에 유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직접 이름이 거명된 당사자들은 다르다. 특히 졸지에 ‘떡값검사’라는 별칭을 얻게 된 전·현직 검찰 7인방은 앞다투어 홍 대사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 노 의원과의 법정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안강민 전 서울지검장은 “반드시 명예회복하겠다”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사실 확인을 위해서는 홍 대사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한 상황이 된 것이다.
당시 법무차관 신분으로 떡값검사 명단에 올랐던 김상희 전 법무차관도 지난달 18일 국회에 출석, “홍 대사가 귀국하여 진실을 밝히면 억울함이 벗겨질 것”이라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속사정이야 어찌됐건 이들 입장에서는 홍 대사가 그들의 ‘무죄’를 입증해 줄 유일한 ‘증인’인 셈이다.
<중앙일보> 편집국장 출신으로 X파일에 실명이 공개되기도 했던 고흥길 의원도 홍 대사의 귀국 쪽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는 “사건이 나온 이후 홍 대사와 연락을 한 적이 없다. 귀국이야 뭐… 임기가 완전히 끝나는 가을쯤이면 들어오지 않겠나. 녹취록 자체가 허위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조사를 받더라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뭐가 무서워서 귀국을 못하겠는가”라며 “나도 최근에야 녹취록 내용을 보게 됐는데 전혀 사실과 다른 내용이다. 언제 들어올지는 내가 알 수 없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아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없다고 본다. 빨리 와서 진실을 규명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으로 최고의 관심을 받게 된 민노당 노회찬 의원도 홍 대사의 귀국을 바라는 사람 중 하나다. 노 의원은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한 이후 “지금이라도 당시 삼성자금을 전달한 이학수, 홍석현씨, 이를 지시한 이건희 삼성 회장을 즉각 구속 수사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홍 대사와 삼성을 압박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최근 홍 대사 주변에서는 ‘귀국이 당분간은 어렵다’는 분위기가 무게있게 관측된다. 홍 대사측과 가까운 한 인사는 “홍 대사가 현재 미국의 한 대학에 머물면서 당분간 정국의 흐름을 지켜볼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이 같은 분위기를 전했다. 홍 대사가 연구원 자격으로 머물 계획을 세우고 있는 곳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스탠포드 대학인 것으로 전해졌다.
▲ 홍석현 주미대사가 연구원으로 머물 계획을 갖고 있는 스탠포드대 전경. | ||
일단 홍 대사가 임기를 마친 이후 귀국을 하지 않는다 해도 겉으로는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다는 점도 그의 미국체류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외교통상부의 인사규칙상 직무를 마친 대사가 업무 보고를 외교통상부에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귀국을 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기 때문이다.
외교통상부의 한 관계자는 “사표 수리문제는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할 일이다. 아직 실무선까지 홍 대사의 사표는 내려오지 않았다. 임기가 끝난 뒤에도 홍 대사의 귀국 문제는 본인이 판단하면 된다. 외교통상부 인사규정상 임기 중 활동과 관련 보고를 하도록 되어 있으나 반드시 귀국을 해야 하는 등의 규정은 없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홍 회장측과 마찬가지로 삼성측도 귀국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그룹 한 관계자는 “개인적으로는 ‘홍 대사의 귀국이 당분간은 어렵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검찰의 수사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고 대선자금에 대한 수사여부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귀국 문제를 결정하기보다는 좀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지 않겠나. 그리고 ‘공공의 적’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귀국을 결심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