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자랑하는 강대국에 ‘입심펀치’
▲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5일 유엔 연설을 통해 “제국주의적 사고와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과 미국을 겨냥한 발언으로 보인다. | ||
노 대통령은 연설에서 “세계 여러 분야에 남아 있는 제국주의적 사고와 잔재를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 …일부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강대국 중심주의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 “이 점에 관해서는 오늘날 국제질서를 주도하고 있는 나라들이 먼저 자신들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각별한 성찰과 절제를 해야 할 것이다. …21세기 질서는 강대국과 약소국 중견국이 공존해 번영을 누려야 하며, 국제질서의 주도국들은 먼저 자신의 과거 미래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노 대통령은 과연 미국을 겨냥했는가. 그가 천명한 ‘반제(反帝)’의 날은 미국을 향한 것인가. 답은 ‘그렇다’이다.
◆‘제국주의’는 노 대통령 아이디어〓청와대와 노 대통령의 측근들에 따르면 ‘제국주의’란 표현은 노 대통령의 작품이라고 한다. 연설문 준비단계에서 노 대통령이 ‘제국주의’라는 단어를 포함시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통상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제국주의는 강대국이 영토 침략 등을 통해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권을 다른 국가로 확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중반까지 존재한 영국 프랑스 일본과 같은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엔 엄밀한 의미에서의 고전적 제국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나 제3세계, 또 우리나라의 일부 진보 진영에서는 유일 초강대국으로 국제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라고 보는 시각이 엄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청산될 제국주의적 사고와 잔재’라고 강조한 그 제국주의의 대상으로 특정 국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노 대통령의 논리와 흉중을 잘 아는 복수의 인사들은 “물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노 대통령이 밝힌 ‘제국주의적 잔재’가 일차적으로는 일본의 행태를 가리킨다. 청와대의 한 주요 관계자는 “주변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일본 지도자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제국주의 역사를 근거로 한 독도 영유권 주장과 극우 망언, 재무장과 우경화 흐름에 대해 국제사회의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노 대통령은 일본의 유엔 안보리 진출 시도를 견제할 필요에서 이 같은 발언을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이 경우 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이 스페인 파키스탄 등과 함께 ‘중견국가 그룹’을 주도해온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은 연설에서 한국과 일본을 주축으로 펼쳐졌던 ‘유엔 안보리 개편 방안’ 대결도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 왼쪽의 고이즈미 총리와 만난 노대통령(위), 오른쪽의 부시 대통령과 만난 노 대통령(아래). | ||
“특정 국가를 지칭할 수는 없지만 이웃나라의 신뢰를 얻으려는 노력 없이 힘과 경제력에만 의존하려는 경향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 말의 속살을 뒤집어 보면 노 대통령이 언급한 제국주의의 대상과 의미가 분명해진다. 바로 미국이다.
노 대통령은 최근 힘의 논리에 의지한 미국의 세계 지배에 상당한 우려를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최근의 ‘유엔 개조론’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유엔에 재정적인 기여를 한 만큼 유엔이 미국 입장을 잘 반영해줘야 한다는 시각이다. 미국이 현재 주창하는 유엔 개조론은 미국이 원하는 쪽으로 유엔이 운영돼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구축된 논리다. 결국 미국의 ‘유엔 개조론’은 한마디로 유엔의 최대 주주이자 최강국으로 자신의 이해에 맞춰 유엔을 구조조정하자는 것이다. 이웃나라들의 강력한 우려 표명에도 불구하고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선두주자격인 존 볼턴을 유엔 주재 미국대사에 임명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노 대통령이 연설에서 “이웃나라에 대한 존중과 국제적인 합의 창출, 그리고 대립 해소를 위한 노력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 강대국들이 평화와 공동번영이라는 대의의 국제질서를 이루려고 노력할 때 ‘힘’과 ‘대의’ 간의 긴장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 것은 이런 점을 비판한 것이다.
이는 노 대통령이 16일(한국시간) 숙소인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코리아 소사이어티 연례 만찬에서 미국을 향해 행한 연설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노 대통령은 이날 1천2백여 명의 미국 내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한 연설에서 북핵 협상과 동북아 전략에 있어서의 미국측의 ‘발상의 전환’을 촉구했다. 노 대통령은 “미국의 동북아전략이 대결구도보다는 ‘화해와 협력, 통합의 질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설정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힘의 논리에 의지하면 안된다고 충고한 셈이다.
노 대통령은 또 “대결적 질서를 부추기는 일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불편해지겠지만 지금처럼 평화로운 협력의 질서를 원한다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다분히 미국 내 네오콘의 행태, 미국을 지배하는 ‘제국주의적 사고’를 겨냥한 발언이다.
◆커지는 논란, 진화 분주한 여권〓당장 한나라당과 국내 보수적인 단체 및 언론에서부터 불만 섞인 문제제기가 튀어나왔다. 제국주의라는 표현을 끌어들여 강대국에 날을 들이대는 인상까지 줄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영남 출신 의원들은 “9·11테러 이후 전개되고 있는 국제 질서 속에서 제국주의라는 표현이 어느 나라를 겨냥하는 것인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왜 미국을 자극하는 거냐”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에 대해 여권은 “참여정부는 이라크 전쟁이 침략전쟁이라는 여론이 팽배해 있는 상태에서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전쟁터에 보냈고, 최근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와 복구 등을 위해 현재로서는 세계 최고 수준인 3천만달러를 미국에 지원하기로 했다. 한미관계는 과거보다 더 좋아졌다”고 파문 확산 방지에 분주하다. 노 대통령의 반제 발언 논란이 어디까지 갈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