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조절 못하면 고건 발 밟는다
▲ 정치행사 첫걸음 고건 전 총리(오른쪽)가 지난 12일 심대평 충남지사가 중부권 신당 추진을 공식 선언하는 자리에 참석해 심 지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하지만 고 전 총리는 자신의 팬클럽이 정치 행위를 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어 양측간의 갈등도 예상된다. 우민회는 과연 고건 대권 가도에 고속도로를 만들어줄 수 있을까.
고건 전 총리가 지난 9월12일 열린 심대평 충남도지사의 신당 창당 발표 회견장에 전격 참석, 그 배경을 두고 많은 말들이 오갔다. 그도 그럴 것이 고 전 총리는 지난해 5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정치적으로 해석될 만한 행사에는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 심 지사의 ‘정치 행사’에 처음으로 참석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고 전 총리의 행사 참석을 두고 ‘고건발 소 정계개편의 신호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신당이나 민주당에서 차기 대선 후보로 고 전 총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고 전 총리가 자신을 중심으로 중부권 신당 및 민주당과 힘을 합치는 ‘미니 DJP 연대’ 구축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전망도 있다. 실제로 고 전 총리측은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은 하지 말아 달라”면서도 “건전한 정치세력이 태어나는 일이고, 정치상황이 급변하고 있어 참석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연정론 등으로 정계개편의 시동을 걸자, 고 전 총리가 예상보다 빨리 대권 출마 선언을 준비하는 등 급박한 정계 변화에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 첫걸음으로 중부권 신당 창당 발표회견장에 참석했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선 유력한 해석이다. 여기에 신중식 열린우리당 의원이 최근 “고건 전 총리가 연말께 대권 출마 선언을 할 예정”이라고 밝힌 점도 고 전 총리의 빨라진 정치 행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이런 고 전 총리의 본격 정치 행보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곳은 바로 그의 팬클럽인 ‘고사모 우민회’다. 우민회는 지난 4월3일 공식 발족한 뒤 지난 8월 말 2차 전국총회에서 정관을 확정하고 전국 조직을 새롭게 재편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우민회는 “우리가 비정치적 모임임을 명심하고, 정치집단화, 이익집단화하거나, 정치적, 개인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단호하게 배격한다”고 선언했다. 고 전 총리는 총회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우민회 회원들에게 ‘지금처럼 사회봉사정신에 입각해 활동해줄 것’을 당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고 전 총리가 신당 창당 발표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등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보이자 우민회도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길을 가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진다.
먼저 우민회는 오는 9월24일 간부 모임을 준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끝장토론’을 가진 뒤 정치행보 선언 여부를 최종 결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민회의 탄생에 깊숙이 관여한 핵심간부 A씨는 “지난번에 고건 전 총리가 심대평 지사 모임에 참석한 것을 보고 솔직히 충격을 좀 받았다. 고 전 총리는 그동안 우민회 등 자신의 팬클럽에 순수 봉사조직으로 남아달라고 해서 최대한 정치적 활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고 전 총리가 정치적 행위로 해석될 수 있는 모임에 참석했다. 이제 우리도 우리 갈 길을 가야 한다고 본다. 필요하다면 ‘비정치’를 천명한 모임의 정관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끝장토론을 통해 고 전 총리의 행보와 별개로 독자적인 정치 행보를 해나가야 한다고 본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우민회는 지금까지 순수 봉사모임으로서 고건 전 총리의 이미지 홍보에 주력하겠다고 강조해왔기 때문에 입장 번복을 하게 될 경우 모임의 순수성이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이 간부는 사견임을 전제로 “어차피 우리 모임이 연예인 팬클럽도 아니고 고건 전 총리를 대통령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 아닌가. 우리가 순수 봉사만 한다고 해서 국민들이 그대로 믿어줄 리도 없다”라고 밝혔다.
우민회는 앞으로 정치 선언에 그치지 않고 정당으로의 변신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시기는 오는 11월 전후로 알려진다. 사실 우민회는 조직 자체가 ‘준정당’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모임은 전체 회원 모임인 ‘총회’를 두고 산하에 최고의결기관인 ‘중앙운영위원회’와 상설집행기관인 ‘상임위원회’를 두고 있다. 상임위원회에는 기획 조직 정책 홍보 IT팀 등 정당의 구조와 거의 유사한 조직을 갖추고 있다. 또한 전국에 시도지부 성격의 지부운영위원회를 두고 있는데 이 조직이 향후 전국 정당화의 산실로 자리잡을 수 있다.
현재 우민회는 온라인 회원 2천 명, 오프라인 3천 명으로 모두 5천 명의 회원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 그런데 우민회가 정치 세력화를 선언한다면 회원도 더 많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우민회가 정치 세력화 선언에 ‘조바심’을 내는 또 다른 이유는 고건 지지 세력의 선두에 서기 위해서라는 내부적 고민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민회가 고건 팬클럽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긴 하지만 다른 조직과의 경쟁에서 밀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존재한다는 것. 이런 ‘조바심’ 때문에 정치 세력화 선언을 더욱 앞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고건 전 총리와는 직접 관계는 없지만 강운태 전 농림수산부 장관이 주도하고 있는 ‘PARFUS 포럼’도 상황에 따라 고 전 총리의 장외 조직으로 변신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단체는 강 전 장관이 2004년 총선에 실패한 뒤 그 해 9월부터 전국의 대학에 특강을 다니면서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봉사단체라고 한다. 강 전 총리의 강의 내용 중 ‘평화 선도, 경제문화 선도’ 등의 여섯 가지 비전의 영어 첫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올해 2월 서울에서 포럼 형태로 처음 만들어져 매월 한 번씩 모여서 등산도 하고 사회와 나라 걱정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 모임은 전국적으로 급격하게 조직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강 전 장관은 고 전 총리의 경기고 후배이자 내무부 관료 후배로서 오랜 친분을 맺고 있다. 고건 전 총리와 오랜 친분이 있는 한 인사는 “강 전 장관은 거의 매일 고 전 총리를 만난다고 할 정도로 두 사람 관계는 밀접하다. 지금 강 전 장관은 물밑에서 조용히 고 전 총리의 정치 기반을 다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 전 장관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PARFUS포럼은 순수 봉사조직으로서 고 전 총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고 지금으로선 고 전 총리의 향후 정치적 플랜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지지 말고의 여부도 알 수 없다”며 선을 그었다.
우민회 한 관계자는 “우민회는 온라인 모임이기 때문에 회원들 간 스킨십 등에 한계가 있다. 반면 강 전 장관 조직은 개인끼리의 강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상당한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고 전 총리가 본격적으로 정치 행보에 나설 경우 지지세력의 교통정리가 필요한데 우리가 강 전 장관 모임에 흡수되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우민회는 그동안 고 전 총리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정치색을 자제하며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지도부가 9월 말 회의를 통해 본격적인 정치 세력화를 선언할 경우 고 전 총리측과 갈등을 빚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 전 총리측은 이 문제에 대해 “우민회가 출범 당시 밝힌 것처럼 정치조직이 아닌 순수한 봉사단체가 됐으면 한다. 고 전 총리가 직접 운영 또는 관여하는 모임이 아니므로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정치 조직화하는 등 불필요한 파장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우민회의 이런 정치 행보에 대해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일부 정치지망생들이 정치적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우민회의 정치 세력화를 성급하게 추진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팬클럽은 순수하게 정치인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는 단체다. 만약 그 순수성에 의심이 가는 정치적 행위를 한다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민회는 과연 고건을 사랑하는 모임으로 남을까, 아니면 고건을 곤혹스럽게 하는 모임으로 변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