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사기꾼 걱정하는 이상한 상황이…
“창이란 조직은 전부 다 사기였다. 실체가 없다.”
29일 기자와 만난 경찰관계자는 이같이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창 사기단은 몇 개의 그룹으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이번에 검거된 것은 모두 창 사기단 내부의 세 개 그룹이다. 각 그룹의 보통 3~4명의 구성원으로 이뤄져 있으며 피해자들을 알선하고 모집해 실제로 돈을 받아내는 역할을 분담했다. 범행을 처음 계획한 이는 1그룹의 우두머리 김 아무개 씨(59)였다. 김 씨를 중심으로 창 사기단엔 이른바 ‘선수들 중 선수들’이 모였다. 2그룹의 수장은 전과 37범이란 화려한(?) 전적을 갖춘 김 아무개 씨(64)이며 안 아무개 씨(여·45)는 3그룹을 이끌었다. 경찰은 “어떤 사람이 조직을 총괄하는 게 아니었다”며 “세 개의 그룹이 제각각 사기 범행을 했지만 서로 정보공유를 하고 돈을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조직처럼 활동했다”고 밝혔다.
먼저 ‘창 사기단’의 주범 김 씨는 한 사람으로부터 약 31억 원을 뜯어낼 정도로 ‘꾼 중의 꾼’이었다. 김 씨는 유인책들을 시켜 피해자들을 소개받았다. 유인책들은 “우리는 국가정보원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청와대 직속 비밀 자금 관리기관인 창을 관리하고 있다”며 강남의 이름난 부자들인 피해자 4명을 김 씨에게 소개했다. 그 중 31억 원을 뜯긴 피해자는 바로 A 씨. 김 씨는 “‘창’은 창고의 약자로 국가기관인 창의 관리자가 나다. 그 안에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온 골드바(금괴)가 수백 개 있다”며 “1㎏짜리 금괴 60개를 30~40% 정도 싼값에 사 주겠다”고 A 씨를 유혹했다. 경찰은 “지금 1㎏짜리 금괴가 4800만 원 정도 한다. A 씨가 실제로 그렇게 저렴한 가격에 사서 되팔면 몇 십억 원이 이익이 남는다”며 “김 씨는 금괴 수십 개나 현금다발을 들고 있는 자기 사진을 보여주며 A 씨를 안심시켰다”고 밝혔다. 눈앞에서 금괴 사진을 보여주자 A 씨는 31억 원을 김 씨에게 지불했다. 하지만 김 씨의 금괴는 전부 도금된 것이었고 김 씨는 같은 방식으로 A 씨를 포함한 피해자 4명으로부터 약 32억 원을 가로챘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과 이름이 매우 비슷했다.”
이쪽 업계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명 ‘선수’인 또 다른 김 씨는 자신의 이름을 최대한 활용했다. 김 씨 역시 전과 10범 이상의 스펙을 갖추었고 대부분 사기 범행이었다. 무엇보다 한 전직 대통령의 자녀들과 이름이 비슷했던 점이 김 씨의 최대 무기였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자신이 전직 대통령의 숨겨진 핏줄이라고 피해자들을 속여 왔다고 한다. 환갑이 넘은 나이임에도 풍채가 좋고 잘생긴 외모를 자랑했던 김 씨의 표적은 일본인 B 씨. 경찰은 “김 씨는 아는 목사를 시켜 B 씨를 소개받았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나는 창의 자금 관리책이다. 창에서 금괴를 처분하는 데 엔화가 필요하다”며 “투자를 하면 5억 원을 주겠다”고 미끼를 던졌다. B 씨는 일본에서 직접 1700만 엔을 들고 와서 김 씨에게 전달할 정도로 호감을 보였다.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3그룹의 수장인 여성 안 씨다. 안 씨는 피해자들에 대한 접근방식부터 독특했다. 그녀는 일본 여자 연예인의 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내걸고 자신이 미모의 여성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 안 씨는 2014년 12월경 오로지 전화와 카카오톡 채팅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나는 해외 유명 투자회사의 국제재무분석가고 분석능력이 뛰어나다”며 “고급 투자 정보를 주겠다. 몽골의 광산 투자, 러시아 석유 수입을 보장해주겠다”고 피해자들을 속였다. 피해자들은 단 한 번도 안 씨를 실제로 보지 못했지만 총 2억 원을 송금했다. 피해자들의 직업은 회계사, 건설사 임원, 세무사 등으로 전문직이 많았다. 경찰은 “안 씨는 남자를 홀리는 데 귀신이었다. 사진도 예쁘다보니 안 씨를 만나지도 못했던 남성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국제재무분석가는 안 씨의 진짜 직업이 아니었다. 경찰에 따르면 안 씨는 단 하나의 재무 관련 자격증조차 없었다고 한다. 과거 일반 사설 학원에서 자산관리사에 대한 교육과정을 3개월 정도 수강한 것이 전부였다. 더구나 안 씨는 지방의 한 대학교를 졸업하고 학원의 수학 강사로 일했을 뿐 재무 관련 경력을 쌓지도 않았다. 안 씨의 외모 역시 평범했다.
그런데 안 씨는 ‘리플리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리플리 증후군은 현실을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어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다. 송파경찰서 장광호 경제범죄수사과장은 “프로파일러들의 분석 결과 안 씨는 전형적인 리플리 증후군이었다”며 “리플리 증후군의 원인은 열등감과 불안감 그리고 도태심리다. 도태심리 때문에 안 씨는 저장강박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했다. 경찰은 안 씨 집 안에서 8개월 치 쓰레기 더미를 발견했다.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선 생활쓰레기는 물론 소변통과 생리대 등이 나왔다. 장광호 수사과장은 “안 씨는 버림받을 까봐 두려워서 자신의 소변조차 버리지 못했다”고 보탰다. 안 씨는 경찰 조사 당시에도 자신이 국제재무분석가라고 끝까지 주장했을 정도로 ‘착각’ 속에 살았다.
‘창’ 사기단에서 안 씨는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동료들이 입금 받은 수표와 통장의 진위 여부를 알려줬다. 경찰은 “동료가 담보로 50억 짜리 수표를 받으면 일단 그걸 안 씨에게 카톡으로 보냈다”며 “안 씨는 은행들이 수표에다가 숫자 표기를 어떻게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을 해줬다”고 설명했다. 안 씨는 재무제표 분석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워낙 ‘분석력’이 탁월했던 것. 수십억 가치의 수표와 현금이 오가는 ‘창’ 사기단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런데 피해자들에게도 그녀는 소중한 존재였던 것 같다. 경찰에 따르면 안 씨에게 당한 건설사 임원 등 피해자들 일부는 안 씨가 수감된 구치소를 지금도 종종 찾는다고 한다. 안 씨에게 속아 수억 원을 사기당했으며 안 씨의 실제 얼굴까지 확인했음에도 피해자들은 그녀의 안부를 묻기 위해 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창’ 사기단의 마지막 선수는 안 씨와 공동 작업을 병행한 이 아무개 씨. 안 씨에게 회계사, 건설사 임원 등을 소개시켜준 이가 바로 이 씨였다. 경찰은 이 씨를 추적 중이다. 이 씨는 2013년 9월 안 씨와 함께 피해자들에게 “우리는 조선의 황실재단, 영국 종교재단의 자금관리인이다”며 “650억 원을 대출해주겠다”고 소개했다. 게다가 이 씨는 한국불교재단의 자금과 필리핀의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비자금까지 자신이 속한 ‘창’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 씨는 자신의 성을 이용해 스스로를 조선 왕실의 후손이라고 했다. 실제 한국 불교재단의 관계자인 한 스님의 이름을 거론하며 자신을 그 스님의 비서라 소개하며 재단 돈을 관리하고 있다고도 했다”며 “이 씨는 필리핀을 자주 오갔기 때문에 마르코스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한다는 거짓말도 늘어놓았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창 사기단의 총 인원은 약 40~5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에 검거된 세 개의 그룹 말고도 2개 이상의 그룹이 더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현재 드러난 피해금액만 약 37억 원으로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창’ 소속 선수들이 경찰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창’ 사기단의 기상천외하고 교묘한 연극은 언제쯤 막을 내릴까.
최선재 기자 sun@ilyo.co.kr
안씨는 왜 ‘리플리증후군’ 앓게 됐나 외모·국적·이름·직업 모두 거짓말 안 씨는 경찰 조사를 받을 때도 재무분석 능력이 뛰어난 국제재무분석가인 것처럼 행동했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그녀가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이유는 뭘까. 안 씨에 대한 수사를 담당한 한 형사의 분석이 눈길을 끈다. “수사관 둘이랑 안 씨 집에 들어가니까 8개월 동안 혼자 먹고 쓰고 잔 물건이 전부 있었다. 안 씨가 정신이 이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집안 내력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열등감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스포츠 협회의 이사였다. 언니와 오빠는 예쁘고 잘생겼다. 학교도 잘 나왔다. 근데 안 씨는 시골학교를 나왔다. 사실 가족들 보기에 안 씨는 미운 오리새끼 느낌이었다. 안 씨가 열등감 때문에 어떤 사람을 동경하다보니까 외모는 일본 여자 연예인, 국적은 스위스, 이름은 안 클레오, 직업은 박사이자 국제재무분석가인 다른 사람으로 살게 된 것 같았다.” [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