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로 막을 걸 ‘가래’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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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 참석한 박근혜 대표가 생각에 잠겨 있다. 최근 박 대표의 ‘구국운동’에 대해 당내에서도 우려가 많다고 한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10·26 재·보선전에 ‘올인’을 선언하며, 여권에 “국가 정체성 수호를 위해 구국운동을 전개하겠다”며 날을 세우고 나선 것이 대표적인 사례. 그러나 일련의 행보에 대한 당 내외 평가가 썩 좋지는 않아 의도했던 성과를 이룰 수 있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는 분석이다.
박 대표의 ‘초조감’은 동국대 강정구 교수에 대한 구속 여부를 둘러싼 여권 핵심부와 검찰의 갈등을 대여(對與) 전면전의 계기로 삼으려는 것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박 대표는 지난 18일 가진 긴급기자회견에서 “정권의 심장부에서 나라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들고 있다”며 노무현 대통령에게 정체성에 대한 견해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국가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한나라당이 중심이 돼 국민의 힘을 모아 국민과 함께 구국운동을 벌여나갈 것”이란 말로 장외투쟁도 불사할 것임을 천명했다. 20일에는 “정부 여당이 친북(親北) 인사를 양성해서 우리나라를 사회주의 체제로 이끌고 가자는 것이냐”며 전례 없는 ‘독설’(毒舌)을 퍼부어 눈길을 끌었다.
박 대표의 느닷없는 ‘국가 정체성’ 공세는 “원칙론자인 박 대표가 현 정권의 이념적 수준이 국가체제를 뒤흔들 정도로 심각하다고 인식한 데서 비롯됐다”는 주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 배경을 놓고 갖가지 분석을 낳고 있다. 시기적으로 10·26 재·보선전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인 데다 MB의 당 내외 약진이 두드러지면서 박 대표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당장 “선거를 먹고 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박 대표가 4·30 재·보선에 이어 이번 재·보선에서도 ‘전승’(全勝)을 이뤄 당내 주도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여권과의 ‘벼랑끝 대치’ 정국을 일부러 불러왔다는 해석도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박 대표가 던진 ‘정체성 카드’는 여권의 극한 반발을 불러옴은 물론 당내에서도 ‘무리수’라는 비판에 부딪혀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줄곧 여권 핵심부에 ‘민생·경제 올인’을 요구했던 박 대표가 ‘색깔론’ 시비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정체성 문제를 정면 거론한 것을 두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우선 여권은 박 대표의 행보에 대해 청와대가 직접 나서 “오래전 역사의 심판을 받은 유신독재의 망령이 되살아나 21세기 대한민국의 한복판을 활보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김만수 대변인)고 비판하는 등 대대적인 ‘역(逆) 공세’를 펼치고 나섰다. 아울러 박 대표가 내세운 구국운동이 사실은 MB의 급부상에 초조해진 나머지 꺼내든 ‘박근혜 구명운동’에 불과하다며 맹공을 퍼붓고 나섰다.
우리당 문희상 의장은 박 대표에 대해 “침소봉대도 분수가 있어야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반공 이데올로기·유신시대에 모든 사고가 머물러 있는 채 하나도 진척이 안 되어 있는 것 같다”며 날을 세운 후 “이명박 시장이 청계천으로 뜨니까 위기의식이 들어서 (박 대표가) 세게 나온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박 대표는 독재자의 딸이자, 독재자의 후예다. 구국운동 운운하면서 선거를 겨냥해 의도 있는 색깔론을 펼치고 있다”(한명숙 상임중앙위원), “5공 시절 ‘평화의 댐’ 사기극에 견줄 만한 ‘국민 대사기극’”(전병헌 대변인) 등의 가시 돋친 힐난도 곁들여졌다.
한나라당 내 반응도 비주류와 소장파는 물론, ‘친박’(親朴)으로 분류되는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박 대표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수요모임의 한 핵심 의원은 “박 대표가 ‘국가 정체성 위기’의 근거로 제시한 동국대 강정구 교수 발언은 학계와 시민사회 내 논의를 통해 충분히 걸러질 수 있는 사안이다. 또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에 대한 대응은 ‘검찰 독립 침해’, ‘권한 남용’에 초점을 맞춰야지 국가 정체성으로까지 비약시킬 성격이 아니다”며 “괜스레 `색깔론’으로 비칠 만한 얘기를 박 대표가 꺼내는 바람에 거당적으로 전개해 왔던 ‘수구 꼴통’ 이미지 벗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고 말했다.
차기 대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는 MB와 손학규 경기지사측의 반응도 냉담하기만 하다. 손 지사는 “소모적인 이념논쟁을 이용한 ‘편 가르기’는 그만둬야 한다”는 말로 점잖게 타일렀고, MB는 아예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 대통령과의 청와대 단독회담(9월7일)에서 박 대표가 강인한 면모를 보여줬을 때만 해도 ‘내키지 않았지만’ 찬사를 보내야 했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웬만해선 박 대표가 하는 일에 이의를 달지 않던 친박 진영에서도 ‘이건 아닌데…’라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이른바 ‘흑기사단’의 일원인 한 초선 의원은 “박 대표가 느닷없이 ‘국가 정체성 투쟁’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당의 보수화가 더욱 심화될 것이란 우려가 당내에 많다. 문제는 박 대표가 이 같은 위험성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얼마 전 박 대표와 재·보선 지원유세에 함께했다 모처럼 용기를 내 정체성 투쟁의 문제점을 거론했다가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몰라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다’는 면박만 들었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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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면 반전을 위해 던진 ‘승부수’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자 박 대표의 언행에도 다급함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박 대표는 지난 20일 공개회의 석상에서 “대표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의원들도 지역 행사와 연락체계를 동원해 이 정부에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확실하게 싸워야 한다”며 결속을 거듭 당부했다. 이를 두고 한 당직자는 “박 대표 혼자 잔다르크처럼 뛰어나갔는데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데 대한 답답함의 표현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박 대표측의 초조함은 그동안 별다른 접촉이 없었던 ‘뉴 라이트’(New Right) 등 당 외곽 보수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고 나선 데서도 드러난다. ‘구국운동 전개’를 선포(18일)한 다음날 박 대표는 서울 중구 정동 성프란체스코회관에서 열린 ‘뉴라이트 네트워크’가 주최한 ‘세금폭탄 저지 및 알뜰정부 촉구대회’에 참석, 보수층에 대한 ‘공개 구애’에 나섰다.
이 자리에서 박 대표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여러분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다”며 주최측에 찬사를 보낸 후 “뉴라이트와 한나라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를 지켜 국가를 선진화해야 한다는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 (여러분들과) 작은 차이는 서로 이해·포용하고 나라를 함께 걱정하는 동지, 희망의 역사를 함께 나누는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화답하듯 주최측도 “프랑스의 위기에 하늘의 부름에 응답한 소녀 잔다르크가 있었고, 영국병을 과감히 치료한 대처 수상이 있었다. 조국은 잔다르크와 대처를 뛰어넘는 지도자를 원한다”(한국기독교개혁운동준비위 한성준 대표) 등의 수사로 박 대표를 한껏 치켜세웠다. 박 대표의 한 측근은 “그동안 뉴 라이트 진영과 소통할 기회를 마련치 못했는데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고 말했다.
박 대표가 한동안 거리를 둬왔던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와의 결속을 강화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 대표는 긴급기자회견을 가진 지난 18일 박사모 회원들에게 “강정구 교수 파문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나라 지키는 일에 모두 앞장서 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보수층을 상대로 한 박 대표측의 ‘외연 넓히기’에 대해 당내에선 기대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박근혜식 구국운동’에 동조하고 나선 세력들이 대부분 당이 표방하는 ‘중도 보수’보다는 ‘극우 보수’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은 터에, 박 대표가 이들과 섣불리 연대할 경우 이념·노선·정책이 더욱 더 보수화될 것이란 판단에서다.
중도 성향의 한 영남권 3선 의원은 “천정배 법무장관의 지휘권 발동을 박 대표가 국가 정체성 문제로 연결 지은 것은 분명 비약이다. 문제는 박 대표의 당 내외 핵심 지지세력들이 그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정체성 투쟁을 계기로 박 대표를 더욱 더 오른쪽으로 끌고 가려는 기도가 강화되는 것 같으며 실제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아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이 중진은 “내가 아는 뉴 라이트 핵심인사 중 몇몇은 ‘박 대표가 표방한 구국운동을 지지하는 측에는 보수언론에 노무현 정권 규탄 광고를 심심찮게 내는 극우단체들이 많다. 뉴 라이트의 주축은 박 대표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에 대해 지나치다는 판단을 갖고 있다’고 말하더라”며 “특히 전문가 그룹이 주축을 이룬 단체들 사이에선 최근의 구국운동 선언을 ‘또 하나의 정쟁’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여서 박 대표의 ‘보수 껴안기’가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