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피’ 거름 삼아 미쓰비시가 번창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나가사키현의 군함도. 일제시대 조선인 강제징용자 사이에서는 ‘지옥섬’ ‘감옥섬’으로 불릴 만큼 한 서린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작은 사진은 구글맵에서 캡처한 군함도.
“한번 들어가면 자의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고립 속에서, 미쓰비시 광업이 저지르고 있는, 광부들에 대한 가혹 행위가 어떠한지는 전연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채 이들 섬은 감옥과 같은 수용소로 변해갔다. 여기에 감금되어 혹사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증언하듯, 사키토지마는 ‘귀신섬’, 다카시마는 ‘백골섬’으로 불렸고, 하시마에는 ‘지옥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군부독재 속에서 절필했던 작가 한수산은 일본에서 군함도에 얽힌 이야기를 알게 된 뒤 다시 펜을 잡았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만행 속에서 스러져간 젊은이들, 배상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을 알고도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생한 소설이 <까마귀>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도 <군함도>라는 제목을 달고 2009년 출판됐다. 출간 당시 화제가 되어 양국에서 군함도에 얽힌 슬픈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책 출간 6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영광’으로 우리 민족의 한 서린 역사를 덮어버리고 있었다. 역사 왜곡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취재진은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섰다. 10월 30일 나가사키의 날씨는 흐렸다. 군함도로 향하는 기점인 나가사키항의 모습은 회색 하늘과 어울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군함도는 나가사키항에서 배를 타고 30여 분을 가야 볼 수 있다. 군함도 관광 사업을 하고 있는 해운사는 총 다섯 곳이다. 코스는 두 종류다. 군함도 주변을 배를 타고 한 바퀴 도는 일주코스와 상륙코스다. 상륙코스는 배에서 내려 가이드와 함께 섬 안 일부 구역을 둘러볼 수 있다. 파도가 높으면 물론 들어갈 수 없다.
취재진이 찾은 날은 입도가 불가능했다. 파도 때문이 아니었다. 일행을 이끈 가이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영향으로 군함도를 입도할 수 있는 코스는 내년 4월까지 꽉찼다”고 설명했다. 일주코스는 3300엔(한화 3만 원)으로 한 시간여 배를 타고 돌아오기엔 저렴하지 않은 금액이다. 상륙코스는 4200엔(한화 4만 원)이다. 상륙코스는 오전 9시와 오후 1시, 일주 코스는 오전 9시 30분과 오후 1시 30분으로 두 번씩 운항한다.
나가사키는 미쓰비시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멀리 빨간 다아아몬드 문양 세 개가 합쳐진 미쓰비시 마크가 보인다.
표를 끊는 부스 양옆에는 ‘축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 세계문화유산 등록’이라고 한자로 적힌 플래카드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표를 파는 곳 옆에는 군함도 내부 모습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진 모형이 있었다. 번듯한 아파트, 병원 등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잘 짜인 계획도시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당시 이곳에 조선인, 중국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일했고, 이곳이 ‘지옥섬’ 혹은 ‘감옥섬’으로 불렸다는 사실은 적혀있지 않았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들뜬 표정의 중년 여성들만 삼삼오오 모여 승선을 기다렸다.
70여 년 전 지하 900m의 뜨거운 갱도로 우리 민족을 밀어 넣었던 일본은 섬을 철저히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우리의 아픈 역사를 또 한 번 능욕하고 있었다. 승선을 돕는 직원들은 모두 광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옅은 회색 작업복에 완장을 두르고, 머리에는 헬멧을 쓰고, 워커를 신고 관광객들을 맞았다.
뭍에서 떨어져 바라본 나가사키는 미쓰비시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울산을 가면 어디서도 현대 마크를 볼 수 있듯, 이곳 역시 어디서나 미쓰비시를 나타내는 빨간 다이아 문양 세 개가 합쳐진 마크를 볼 수 있었다. 나가사키 미쓰비시 조선소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다. 군함도와 함께 ‘메이지산업혁명유산군’으로 묶인 제3도크, 크레인 등을 볼 수 있었다. 각 1905년과 1909년 준공된 시설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고 선내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항구에선 거대한 크기의 선박이 축조되고 있었다. 군함도의 해저 탄광뿐 아니라 이곳에서도 수많은 조선인이 노역을 했다. 취재진에게 강제징용 역사 설명을 도맡은 기무라 히데토 씨(71)는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강제노역을 했던 한 어르신과 만난 이야길 들려줬다.
위에서부터 군함도행 배가 있는 나가사키항 매표소, 승선하는 관광객, 군함도 기념품을 사는 일본인들.
우리 민족의 한이 서린 나가사키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20여 분을 가자 다카시마가 눈에 들어왔다. ‘죽음의 섬’이었던 곳. 이곳도 해저탄광이 개발돼 많은 광부가 일했다. 섬의 전성기엔 2만 여 명이 살았다. 특히 다카시마에는 조선인 유골을 모신 납골당이 있었지만 미쓰비시는 다카시마에서 탄광산업을 철수하면서 납골시설을 불태워버렸다. 유골의 신원을 알 수 있도록 위패가 있었지만 미쓰비시의 만행으로 조선인의 유해는 후세도 찾아갈 수 없게 돼 버렸다.
꽤 큰 규모의 섬인 다카시마 옆에는 아주 작은 무인도가 있다. 중간에 끼인 섬이라는 뜻의 나카지마(中島)다. 섬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작은, 바다 속에서 겨우 고개를 내민 커다란 암초처럼 보이지만, 강제징용 노동자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군함도의 조선인들은 나카지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또 누군가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의 화장터로 쓰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기무라 씨는 “‘지옥섬’에서 바다로 도망치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멀리가지 못하고 적발돼 나카지마로 끌려가 구타를 당했다”고 설명했다. 군함도는 나가사키항에서 20㎞나 떨어져 있고, 가장 가까운 노모자키까지도 5㎞ 거리다. 살 가능성보다 죽을 가능성이 더 큰 거리를 헤엄쳐 도망치려 했던 강제노역 노동자들. 일행이 배를 타고 지나온 바닷길을 되돌아보며 당시 조선인들이 느꼈을 아득함을 상상해보았다.
다카지마 옆 짙은 회색의 섬, 군함도의 모습이 보였다. 칠이 다 벗겨진 건물들은 잿빛 하늘과 어울려 기묘한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같은 배에 탄 일본인 관광객들은 연신 사진 찍기에 바빴다. 섬을 천천히 한 바퀴 돌며 보이는 건물들을 설명하는 선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기무라 씨는 선착장 바로 뒤편에 위치한 갱도 입구를 가리키며 “‘지옥문’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조선인, 중국인들이 일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탄광은 지하 900m까지 파내려갔다고 한다. 석탄 산업이 일찌감치 발달한 유럽에서도 유래 없는 깊이었다. 습도는 100퍼센트, 기온은 45도를 넘나드는 지옥 같은 환경에서 우리 조상들은 오로지 헬멧에 달린 전조등을 의지한 채 땅 밑으로 내려갔다. 전날 오카 마사하루 평화기념관에서 본 깡마른 몸에 속옷만 걸치고 헬멧을 쓴 조선인들의 사진이 떠올랐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일본 최초의 아파트를 놀라운 눈으로 감상할 때 취재진 일행은 아파트 뒤편 조선인 주거지를 눈으로 훑었다. 섬에서 가장 낮은 곳, 파도가 센 날엔 물이 차오르는 곳에서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피곤한 몸을 뉘였다. 기무라 씨는 “일본인 광부들이 살던 16호, 17호 아파트 사이는 조선인이 구타를 당하는 장소였다. 구타와 고문이 이어질 때 아파트 난간에 턱을 괴고 아이들이 구경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섬을 한 바퀴 돌고 돌아가는 길엔 선내에서 군함도에 관한 비디오를 상영했다. 1960~1970년대 군함도에서의 생활상을 보여줬다. 섬 안 학교에서 뛰노는 아이들, 웃으며 탄갱으로 들어가는 광부들, 골목에서 이웃과 이야기하는 여성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흑백 영상을 보며 중년 여성들은 “저땐 그랬지”라며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들의 웃음 앞에서 취재진 일행은 무력했다. 부유한 생활의 토대는 강제징용당한 이들의 목숨 값이라는 것을 아는 일본인은 없었다.
배 위에서 만난 하야시 요코 씨(여·58)는 “군함도에 일본인 광부뿐 아니라 조선인, 중국인 강제징용을 당해 노동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는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야시 씨는 “정부가 한때 당시 노동자들에게 배상한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이 그렇게 많았는지는 몰랐다”고 답했다. 또 유네스코에 등록된 곳이 갱도입구, 일부 호암벽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자 “전체 섬이 등록된 게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안내방송에도, 팸플릿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역사는 전체를 알아야 하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하선 후 승객들을 맞는 건 기념품 매대였다. 석탄모양 러스크(과자), 엽서, 배지, 도록 등을 팔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기념품을 한아름 사며 웃음을 띠었다. 선착장 곳곳에는 메이지산업혁명유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다음호 계속>
나가사키=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군함도는 어떤 곳 콩깻묵 먹으며 하루 12시간 노동 정식 명칭은 하시마. 군함도는 섬 전체 모습이 마치 군함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00년대 후반 미쓰비시가 이곳에서 석탄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개발하기 시작했다. 본래 크기는 현재 섬 전체 넓이에 3분의 1에 불과했다. 간척을 통해 축구장 두 개 넓이로 만들었다. 이 작은 섬에 5000명이 살아 일본 내 최고 인구밀도를 기록할 정도로 번화했다. 학교, 병원, 아파트, 상점, 극장 등 없는 게 없었다. 석탄산업 불황으로 경제성이 없어지자 1975년 폐광하면서 무인도가 됐다. 섬 전체가 미쓰비시 소유였지만 2001년에 하시마를 관할하는 다카시마정에 무상 양도됐다가 2005년 나가사키시에 승계됐다. ‘그들만의 번영’ 뒤에는 강제 동원돼 끌려온 조선인과 중국인이 있었다. 1943년 당시 500~8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10대 소년부터 장년까지 나이에 관계없이 석탄을 캘 수 있는 남성이면 이곳까지 끌고 들어와 강제노역을 시켰다. 지하 갱도 내에서는 일본인 감독관의 구타가 이어졌다. 일본인 광부도 있었지만 가장 깊고 위험한 ‘막장’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몫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22명이 두개골 함몰과 질식으로 숨졌다. 생존자들은 3~4일에 한 번 씩 큰 사고가 발생했다고 증언한다. 일본은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의 숙소를 분리해 관리했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식사로는 현미 20%와 콩깻묵 80%가 섞인 아주 적은 양을 먹었다. 이곳에서 일하던 노동자 중 일부는 나가사키 원폭 투하 후 피해복구에 동원돼 피폭돼 후유증을 앓기도 했다. 해방 후까지 남아있던 조선인들에 대한 귀국조치도 일본은 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차비와 배편을 구해 귀국했다. 귀국 과정에서 배가 난파돼 사망한 이도 많았다. [서]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일본의 꼼수 살펴보니 ‘forced to work’ 제멋대로 해석 헐~ 나가사키현 곳곳에는 군함도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자축하는 플래카드가 세워져있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근대화 초기 유산 23개를 묶어 ‘규슈·야마구치 근대화산업유산군’이라는 이름으로 관리했다. 하시마 섬을 비롯해 대형 군함을 건조했던 에스비가하나 조선소, 군함 제조를 위한 철을 납품했던 오이타야마 타타라 제철소, 후쿠오카의 야하타제철소 등이 포함됐다. 다수의 유산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운영되던 곳이었다. 유산군 중 7개소는 조선인을 고국에서 빼와 노예 같은 삶을 살게 했던 아픔의 현장이다. 우리나라의 반대로 군함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 전망이 밝지 않자, 일본은 군함도 내 산업유산군을 1910년 이전에 만들어진 시설로 한정지었다. 섬 안의 건물은 1916년 이후에 지어졌기에 군함도 내에 세워진 건물 중 어떤 것도 포함되지 않았다. 일본의 지속된 유네스코 등록 추진에 우리나라 정부는 맞섰다. 그 결과 일본은 강제징용이라는 뜻이 담긴 설명문구(forced to work)를 추가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유네스코 등재가 결정됐지만, 일본은 이후 ‘forced to work’가 강제노동이라는 뜻은 아니라며 입장을 번복했다. 일본은 ‘목적’을 달성한 후 군함도에 서린 강제징용의 역사를 깨끗이 지워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