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피해자로…관객들은 어리둥절
경찰이 박현정 서울시향 전 대표의 성추행과 명예훼손 의혹을 무혐의로 결론내린 가운데, 박 전 대표를 고소한 곽 아무개 씨에게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해 12월 5일 박 대표가 막말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사타구니 쪽으로 손이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피해자 주장이다.”
지난 12일 기자와 통화한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이같이 말했다. 여기서 ‘피해자’는 서울시향의 직원 곽 아무개 씨다. 곽 씨는 지난해 24일 서울시향의 다른 직원들과 함께 박 전 대표를 검찰에 고소했다. 검찰의 지휘를 받은 종로경찰서가 수사를 맡았다. 종로경찰서는 8월초 박 전 대표의 강제추행과 명예훼손 등의 혐의에 대해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성희롱이나 막말을 구체적으로 들었다고 하는 사람도 없어 공연성 요건이 충족되지도 않았고 동일한 진술을 했던 참고인도 없었다”며 “강제추행 장면을 목격했다는 사람도 없다. 피해자 본인만 그렇게 주장했을 뿐이지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검찰 역시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직원들이 박 전 대표로부터 당했다는 ‘성희롱’이나 ‘막말’ 피해가 사실이 아니었던 것일까. 하지만 박 전 대표에 대한 서울시 소속 시민인권보호관의 조사 결과는 경찰 수사 결과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시민인권보호관들은 박 전 대표의 성추문 의혹이 터진 뒤 인권 관련 민간 전문가 2~4명과 함께 박 대표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고 지난해 12월 11일 서울시향에 박 대표에 대한 ‘직무배제’ 조치를 요청했다.
기자가 입수한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 결정’에 따르면 박 전 대표의 성희롱과 막말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이 적혀 있다. 인권보호관들은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로 음반을 팔아라” “늙수그레한 노인들한테 보내겠다” “병신새끼, 저능아, 노예근성” 등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박 전 대표가 직원들을 괴롭혔다고 결론지었다. 당시 조사 내용 일부가 공개되자 박 전 대표는 서울시향 대표직을 즉각 사퇴했다.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성희롱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이에 대한 참고인들의 일관성 있는 진술이 없었다. 그래서 명예훼손 혐의도 성립하지 않았다”고 했다.
박 전 대표의 곽 씨에 대한 성추행 여부가 이 사건의 ‘핵심’이다. 서울시 인권보호관들은 성희롱과 폭언은 인정했지만 ‘성추행’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최근 서울지방경찰청이 곽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다만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 결정’에는 박 전 대표의 곽 씨에 대한 성추행 의혹이 일어난 회식 자리와 관련된 진술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돼 있다. 해당 문건엔 “9월 26일 박 전 대표가 손바닥으로 상을 치자 상 위에 있던 간장종지가 엎어지면서 자신의 웃옷이 더러워졌고 박 전 대표 왼쪽에 있던 ○○○이 웃옷을 닦았고 오른쪽에 있던 ○○○이 바닥에 흐른 오물을 닦았다”며 “순간 박 전 대표가 오른손으로 피해자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사타구니 사이로 왼손을 내밀어 당황한 피해자는 엉덩이를 뒤로 뺐다”는 내용이 있다.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섣불리 단정할 수 없지만 경찰이 정 감독의 여비서 백 씨에 대해 ‘출입금지’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 주는 의미는 적지 않다. 박 전 대표는 지난해 서울시향 대표직을 사퇴했을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성추문은 사실이 아니다”며 “서울시향이 정 감독의 사조직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저는 이 점을 뜯어고치기 위해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직원들과 마찰이 있어 직원들의 폭로로 이어진 것이다”고 반발했다. 박 전 대표는 “이번 일의 배후에 정 감독이 있다. 저는 정치적 희생양이다”고 보탰다. 이른바 ‘정명훈 배후설’을 제기한 것.
뿐만 아니다. 박 전 대표는 작심한 듯 정 감독에 대해 숱한 의혹을 제기했다. “서울시향에 있는 69세 직원은 정 감독의 처형의 친구이자 정 감독 막내아들의 피아노 선생님이었다”고 언급한 박 전 대표는 “그 분이 5700만 원 받고 계셨는데 9년 전 입사할 때도 59세로 이미 규정 위반이었다”고 폭로했다. 또한 “정 감독의 집을 수리할 당시 정 감독의 비서가 찾아와 정 감독의 부인이 머물 호텔 비용을 청구해 거절했다”는 폭로와 함께 정 감독이 개인 활동을 위해 서울시향 일정을 수시로 변경했다고도 주장했다. 그렇지만 당시 박 전 대표의 주장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서울시 감사관은 정 감독이 자신의 지인을 채용했고, 오스트리아 빈 국립오페라의 객원지휘자 요청을 수락하면서 일정이 겹쳐 지난해 12월 국내 서울시향 공연 일정을 변경한 것을 확인했다. 정 감독이 부인의 거처 때문에 호텔비용을 청구했었다는 점도 사실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서울시는 특별한 위법사항이 없다며 정 감독과 재계약을 맺어 논란이 가중됐다.
서울시향 관계자는 기자와 만나 “경찰과 우리 쪽의 싸움은 아닌 것 같다”며 “경찰 수사 중이라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정명훈 지휘자가 성추행 음모의 배후에 있다는 건, 단순히 그분(박 전 대표)만의 생각이 아닐까 싶다”며 답답한 마음을 내비쳤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