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감히…내 공천은 노터치’
▲ 완승에 도취했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운데)가 지난 10월27일 상임운영위에서 10·26 재선거 당선자들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
인재 영입의 주요 계기인 내년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내에 외부인사영입위원회(영입위·위원장 김형오 의원)라는 별도 기구까지 지난 2월 구성하는 등 의욕을 보였지만, 지도부의 무관심과 당내 지방선거 출마 후보 진영의 견제 등으로 영입위 발족 10개월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미 당내 인사들 간에 ‘후보 난립’, ‘조기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는 서울시장 경선의 양상이 다른 광역단체장 선거에까지 이어질 경우 외부인사 영입의 기회는 더욱 더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당 차원의 영입작업이 이처럼 지지부진한 데는 외부의 인재를 끌어들이려면 그에 합당한 ‘자리’를 줘야 하는데, 이미 눈독을 들이고 있는 당내 세력층에서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영입위측은 2007년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명망과 실력 있는 외부인사의 영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를 위해 내년 지방선거에서 일부 광역단체장 등 ‘노른자위’ 포스트는 영입인사들에게 전략적으로 할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입위 한 핵심인사는 “아무리 한나라당의 인기가 상승세라지만 경쟁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외부 인사가 대선을 2년이나 넘게 앞둔 시점에 여당도 아닌 야당에 몸담겠다고 선뜻 나서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런 만큼 영입에 따른 반대급부, 다시 말해 이들에 일정 비율의 공천을 전략적으로 배당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그래야만 대상자들을 설득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인사는 영입 케이스에 할당될 자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쓸 만한 인사들이 영입에 관심을 보인다면 굳이 한도를 설정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해 가능하면 영입인사들을 전면에 내세워 지방선거를 치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미 지방선거에 출사표를 던졌거나, 던질 예정인 당내 인사들은 영입위측의 이 같은 입장에 “인재 수혈을 내세워 경선이란 대원칙을 훼손하려 한다면 좌시하지 않겠다”며 일찌감치 선을 긋고 나선 상황. 수도권 광역단체장 출마가 유력한 한 3선 의원은 “내 주장은 외부인사 영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영입인사도 다른 후보자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룰 아래서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검증 없이 ‘지명도가 높다’는 등의 이유로 끌어들인 외부인사가 경선이란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공천을 받는다고 하면 당내에 누가 그런 조치를 납득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영입위측과 출마 후보군 진영 간 엇갈린 입장은 실제 당 내외 곳곳에서 이미 마찰을 일으키고 있는 형편이다. 영입위측이 핵심 영입대상으로 설정한 고건 전 총리측과 서울시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일부 후보들 간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사단은 맹형규 홍준표 의원이 최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공개적으로 고 전 총리를 “무책임한 행정가”, “원래 책임을 잘 안 지는 분” 등으로 비판하면서 벌어졌다.
맹 의원은 11월14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에 출연해 “(고 전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이후로 약 3개월간 (대통령) 자리가 비어 있는 동안 오히려 아무 것도 안한 걸로 점수를 딴 분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책임을 잘 안 지는 분으로 알고 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홍 의원도 이보다 일주일 전(11월7일)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 “알고 보면 고 전 총리는 ‘행정의 달인’이 아니라 주로 위원회에 책임을 떠맡기는 현상유지 행정가, 무책임한 행정가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 고건 전 총리(왼쪽), 정운찬 서울대 총장 | ||
상황이 이처럼 돌아간 데 대해 한 영입위원은 “당내에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식으로 발목이나 잡고 나서니 영입 무드가 제대로 조성되겠느냐”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광역단체장 선거에 나서려는 일부 의원들은 말로는 ‘2007년 대선에서 정권을 찾아오지 못하면 당이 망한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며 결기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이해관계에 매몰돼 오히려 대선 승리에 걸림돌이 될 만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의 영입설이 나돌면서 영입위측과 서울시장 후보군 간에 신경전이 벌어졌던 것도 앞서의 경우와 비슷한 사례다. 영입위측에서 정 총장을 유력 서울시장 후보로 점찍고 접촉에 나섰다는 확인불명의 소문이 나돌자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일부 후보들이 영입위측 인사들에 진위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당이 쪼개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 책임은 당신이 져야 하니 알아서 하라”는 ‘협박성’ 충고를 던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양측 간에 갈등이 빚어졌던 것.
이에 대해 영입위 핵심인사는 “김형오 위원장이 최근 정 총장을 만난 적은 있지만 영입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오간 얘기는 없다. 그런데도 당내 일부 서울시장 출마자들이 마치 영입이 확정된 양 난리를 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한 영입위원은 너무 마음고생이 심해 ‘이러다가 당내에서 공공(公共)의 적이 될 것 같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김 위원장에게 한 것으로 안다”고 개탄했다.
이 인사는 또 “외부 영입에 대해 당내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겉 다르고 속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모두들 공개석상에선 외부 영입에 대해 찬성하면서 실제로는 ‘외부 영입=기득권 침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일부 서울시장 후보들이 보인 과민반응은 이런 현상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앞으로 영입작업의 대상이 기초자치단체장, 광역의회 의원들 선까지 확대되면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반발하고 나설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오죽하면 소장파 핵심으로 알려진 한 영입위원은 얼마 전 회의석상에서 ‘되지도 않고 욕 들어먹을 광역단체장 후보 영입은 손대지 말고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쪽에 집중하자’고 얘기하더라”라고 덧붙였다.
외부인사 영입 문제가 이처럼 답보 상태에 빠지자 소장-개혁파 진영의 우려의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수요모임’의 한 핵심 의원은 “외부 영입에 대한 당내의 비협조적 기류는 기본적으로 ‘지금처럼 상승 분위기가 유지되면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 뭐 하러 나서서 영입을 하느라 시끄럽게 하느냐’는 인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며 “당 지지율이 상승하고 10·26 재선거에서 ‘압승’하면서 한나라당 특유의 ‘이지 고잉’(easy-going)하려는 성향이 다시 고개를 든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당내 인사들이 외부 영입에 대해 자꾸 비토(veto)하는 입장을 취한다면, 외부 수혈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설사 지방선거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별반 의미가 없다. 외부 영입에 폐쇄적으로 대하다 보면 자연 정계개편 흐름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되고, 이 경우 지방선거가 2007년 대선 승리의 발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블랙 홀’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전략통으로 통하는 영남권 한 3선 의원은 영입 문제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하는 박 대표의 리더십을 문제 삼기도 했다. 이 의원은 “이회창 전 총재 시절과 같은 ‘제왕적 카리스마’가 당내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선거를 앞두고 외부 영입에 대해 당내에서 반발기류가 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며 “더구나 박 대표처럼 ‘스타일 구기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으려는 리더십으로는 원천적으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외부인사 영입문제를 풀어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이어 이명박 서울시장(MB)과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행태도 비판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지금처럼 광역단체장 경쟁이 과열된 데는 MB와 손 지사가 너무 일찍 ‘차기 지방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탓이 크다. 그럼에도 두 사람, 특히 MB의 경우 시장 선거에 나서겠다는 의원들을 ‘쿨다운’시켜도 시원찮을 판에 이들이 출사표를 던지는 출판기념회마다 참석해 오히려 부추기고 있으니 과열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