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 속에 빠진 대한민국''. 지난 6월 한국의 붉은 색 월드컵 열기를 한 월간잡지가 특집기사로 다룰 때 사용한 타이틀이다. 그럼 지금 10월 초가을의 한국은 어떤가. ‘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으뜸 항도(북한식 표현) 부산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는 북한 열풍이 시간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제14회 부산아시안게임에 북한의 현역 체육 영웅들이 총망라돼 참가했고, 3백62명의 미녀 응원단까지 가세해 경기장 안팎에서 ‘반갑습니다’‘통일조국’‘우리는 하나다’식의 북한 특수가 거세게 일고 있다. 세계 최장신(235cm) 농구 센터 리명훈, 괴력의 처녀 계순희, 탁구 스타 김현희 등 남쪽 땅을 찾은 북한 스포츠 스타들에 관한 뒷얘기를 모아봤다.
올해 우리 나이로 36세의 리명훈은 9월23일 북한 선수단 1진으로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보는 것만으로 눈이 즐거울 정도로 진기한 신장에 한때 미국프로농구(NBA) 진출까지 모색했던 유명인사다. 99년 통일농구 당시 서울을 방문한 이후 약 3년 만에 국제 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곁들여지며 남쪽땅 도착 순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리명훈은 북한의 특별 대접론으로 도착 첫날부터 해프닝을 일으키고, 실전에서는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보여 오히려 마이너스 이미지만 보여준 것 같다. 가는 곳마다 몰려드는 취재 열기에 짜증스런 반응을 보이며 일체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공식 인터뷰 외에 사적인 자리에서 반응을 보인 것은 3일 남북대결 후 ‘농구천재’ 허재가 찾아왔을 때가 유일하다.
리명훈의 이런 ‘장외 오만함’은 실전의 부진과 함께 ‘민족의 재산’이라는 표현에 반감이 나왔다. 아시아 최약체인 몽골전에서만 13득점에 17리바운드 3블록으로 그나마 이름값을 했을 뿐 필리핀전에서는 9득점 13리바운드로 부진하며 200cm 안팎의 상대에 밀려 시종 코트에 넘어지는 안쓰런 모습을 보였다.또 3일 남북대결에서도 한국의 서장훈에게 힘 한 번 못쓰고 14점 3리바운드라는 조촐한 기록을 남겼다. 노쇠화에 따른 스피드와 체력 저하로 더 이상 실전용 선수로 의미가 없음이 입증됐다. 북한도 리명훈의 희비와 함께 1승2패로 부진.
이런 리명훈을 본 한 한국 대표선수는 “물론 리명훈의 고충도 이해한다. 하지만 남쪽의 동포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는 했어야했다. 또 차라리 선수가 아닌 임원으로 참가하는 것이 나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면 통일농구 때 판정의 배려 속에 보여준 뛰어난 활약을 마지막 기억으로 팬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유난히 세계 최고를 좋아하는 사회주의 풍토 탓에 고령에도 고생하는 그의 모습이 솔직히 안타깝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계순희가 졌다. 2일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열린 여자유도 52kg급에서 계순희는 2회전에서 중국의 신예 시안동메이에게 판정패를 당해 패자 결정전에서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그를 가장 확실한 금메달 후보로 여긴 북한은 물론, 아시아 전체가 놀란 대회 최대 이변이었다.
하지만 계순희의 실패는 리명훈과는 달리 아름답다. 리명훈과 함께 도착, 마찬가지로 가는 곳마다 집요한 취재공세에 시달렸지만 계순희는 스물두 살의 순진한 처녀 모습 그대로 항상 밝은 미소와 친절함을 잃지 않았다. 쏟아지는 질문에 간단한 대답이나 가벼운 웃음으로 대하고, 사인 요청에도 쉽게 응했다. 동메달에 그친 성적도 알고 보니 사연이 있었다. 대회 한 달 전 오른쪽 어깨가 탈골돼 거의 연습을 하지 못하는 등 엄청난 중압감과 부담 속에서도 담담히 제몫을 다한 것이다.
비록 이번에 잠깐의 실수와 애매한 심판판정으로 금을 놓쳤지만 최악의 조건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한 모습은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 북한이 “국내 대회에서 계순희가 체급 구별 없는 무제한급에 나와 우승하기도 했다”는 선전이 절대로 과장된 것이 아님을 계순희는 ‘동메달’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다.
“탁수 오빠∼, 계속 그렇게 말할겁네까. 자꾸 그러면 저도 여기 말투 흉내 낼 랍니다.”“왜 남규 오빠는 결혼을 안합니까. 여자가 없어서 그러면 이번에 공화국에서 예쁜 응원단이 많이 왔는데 한 명 찾아보시라우.”
4일 여자탁구 단체전이 열린 울산 동천체육관. 경기를 마친 김현희가 체육관 지하에 위치한 연습장에서 한국 남자팀 관계자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북한 사투리로 오물조물 말하는 모습이 탁구 여전사라기 보다는 북에서 내려온 25세의 귀여운 처녀로만 비쳤다. 강문수 한국 감독이 기자의 신분을 소개한 후에도 특별한 경계심을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가까이서 보니 선머슴 같던 얼굴도 여성스럽고 귀여운 면이 많았다.한국 여자탁구가 단체전에서 5번의 경기중 1승4패, 역대 최악의 성적으로 8강에서 탈락한 반면 이날 북한은 난적 일본을 꺾고 결승까지 올라 세계 정상의 실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북한 여자탁구 돌풍, 그 중심에 위치한 선수가 김현희다.
김현희는 8강전 한국과의 남북대결에서 유지혜 등 한국의 간판선수들을 모두 물리쳤다. 특히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유지혜와의 경기에서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를 연출해 화제가 됐고, 경기 후에는 “언니, 미안해”라며 유지혜를 위로하는 따뜻한 마음씨까지 선보였다. 작지만 귀엽고, 인기가 많은 여자. 김현희는 이날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다잡았던 경기를 자신의 실수로 빼앗길 뻔하다가 동료 김향미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결승 진출을 확정짓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유병철 스포츠투데이 기자
온라인 기사 ( 2024.12.08 1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