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축구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도박과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36년 전인 1967년 8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메르데카컵 대회 때의 일이다. 당시 국제대회에 출전중인 대표팀 선수들 중 상당수는 밤이면 밤마다 포커판을 벌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창단한 양지축구팀 소속 선수들이 주축 멤버들이었다.
하루는 포워드였던 허윤정, 풀백 강수길 등 쟁쟁한 ‘지존’들과 당시 21세 막내였던 ‘풍운아’ 이회택(현 전남 감독)이 ‘맞장’을 떴다. 수 차례 카드가 오고 간 뒤 결국 강수길과 이회택이 판돈을 쓸었는데 강수길은 그 즉시 쇼핑에 나섰고 겁없는 베팅으로 거액을 품에 안은 이회택은 유유히 자취를 감췄다는 후문이다. 결혼 준비 자금으로 모아놓은 돈을 몽땅 털린 허윤정은 대회 직후 홍콩의 세미프로팀과 계약하며 실로 아찔한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1993년 당시 박종환 일화 감독(현 대구 감독)의 ‘포커판 습격 사건’도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다. 일부 선수들이 밤마다 ‘라스베이거스 특설 무대’를 연출하다 ‘호랑이’ 박 감독에게 된통 걸린 해프닝이다. 공교롭게도 박 감독은 당시 축구인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지존’으로 불릴 정도로 포커, 고스톱, 섰다 등 각종 게임의 최고수였다. 하지만 선수들 역시 감독의 ‘승부사’ 기질을 닮았는지 쉽게 카드를 놓지 못했다.
엄청난 꾸지람을 들은 5인방은 사우나실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며 한숨을 내뱉고 있었는데 이때 호랑이 박 감독이 들이닥쳤다. 이 코치로부터 보고를 받은 박 감독은 사우나실 문을 열어젖히고 선수들의 뺨을 때리면서 “짐 싸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L선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정말 선수 생활 마감하는 줄 알았다. 감독님도 선수시절 경험했던 일이라 여러 번 눈감아 주셨는데 그땐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정신이 번쩍 난 ‘도박왕(?)’들은 그해 일화를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저력을 과시했다.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워낙 구단과 선수들의 언론 플레이가 뛰어나 그리 주목할 만한 비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놀이 문화가 다양해지고 인터넷으로 고스톱이나 포커를 즐길 수 있는 탓에 ‘정통 도박’을 찾는 선수들이 줄어드는 추세다. 판돈도 마찬가지. 최근 한 프로팀 일부 선수들이 수백만원이 오가는 도박을 즐기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나 대체로 ‘올인’의 범위는 20만∼30만원 선이다. 그래도 재미 삼아 즐기는 포커판에서 선수 개인의 독특한 개성을 엿볼 수 있다.
30세 동갑내기로 절친한 친구 사이인 대표팀 출신의 선수 C와 J. 두 선수는 가끔씩 만나 포커를 즐기곤 했다. 원래 J는 상대의 표정을 읽는 데 일가견이 있는 반면 ‘표정 관리’가 어색하기로 유명한 C는 언제나 J의 ‘꼼수’에 두 손을 들곤 했다.
패인 분석에 골몰하던 C는 어느날 J의 작전을 간파한 뒤 비장한 각오를 보이며 ‘맞장’을 제의했다. J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첫 번째 패를 돌리는데 C의 손에 승리를 확정지을 수 있는 결정적인 카드가 들어왔다. C는 오히려 인상을 쓰고 고개를 숙이는 속임수를 구사했다. J는 이전처럼 얼굴을 살피더니 ‘옳거니’하며 ‘올인’했다. C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고 처음으로 J의 주머닛돈을 ‘쌈짓돈’으로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시드니올림픽 대표로 활약한 바 있는 K는 일명 ‘뻥카’(좋은 패가 있어도 없는 척하거나 그 반대의 행위를 일컫는 표현)의 대가로 꼽힌다. 그러나 아쉽게도 상대에게 쉽게 걸리는 어설픈 고수(?). 자기의 표정이 상대에게 읽힌다 싶으면 바로 마스크와 모자를 이용해 얼굴을 가리며 자신을 숨긴다.
H대 출신으로 프로에서 활약하다 현재 군복무중인 또 다른 J. 그가 포커를 칠 때면 카드에 이상한 냄새가 밴다는 이야기는 이미 또래 선수들 사이에 널리 퍼진 ‘전설’이다. J는 항상 조커를 잡으면 엉덩이에 낀다. 막판 오픈 때 굴곡(?) 사이에 모셔 놓은 패를 꺼내 힘차게 던짐으로써 상대를 제압해 버린다고. 그럴 때마다 상대는 코를 잡고 아무 말 없이 나간다는 게 J의 ‘게임의 법칙’이다.
J팀의 5년차 미드필더 K는 폼으로 봐선 진정한 도박꾼인데 담배를 왼손으로 잡으며 패를 돌리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폼생폼사’일 뿐이다. 자기 담배가 아니라 동료의 피 같은 ‘돗대’를 뺏어 피워야 백전백승이라는 징크스를 갖고 있다.
유재영 월간축구베스트일레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