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못 믿고 MB는 믿을만? 부시 대북 정보 공유 차별
이동관 전 수석은 지난 2007년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이명박 캠프의 공보실장으로 합류했다. MB의 대통령 당선 뒤 이 전 수석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거쳐 청와대에서 공보수석 겸 대변인, 홍보수석, 언론특보를 지냈다. 잠시 청와대를 떠났던 몇 달을 제외하곤 대통령 임기 5년 내내 MB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이 전 수석이 책에서 언급한 ‘한·미관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을 둘러싼 청와대의 결정과 MB의 회고록을 종합하면, MB 정부의 ‘색깔’이 보인다.
이동관 전 수석은 회고록을 통해 “MB와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한·미 관계가 복원됐다”고 자평했다. 2008년 8월 6일 이명박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청와대 녹지원에서 한-미 정상 공동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회견장으로 들어서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2008년 4월 15일, MB는 첫 해외 순방을 위해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시 대통령은 MB를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대통령 전용 별장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했다. 골프 카트를 타고 캠프 데이비드를 누빈 두 대통령의 모습은 화제가 됐다. MB는 회고록에서 “부시는 내게 ‘친구’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며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당일치기가 관례였으나 부시는 이틀 내내 우리를 환대했다”고 밝혔다.
이 전 수석의 회고록에 노무현 정부와 미국의 관계에 관해 다소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MB가 밝힌 적이 없는 부분이다. 부시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집무실에서 개최한 한·미 정상회담에서 당시 부시 대통령은 “이제부터 한국에 정보를 주겠습니다”고 말했다. 이 전 수석은 이 말을 직접 들었다며 책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부시 대통령의 이 말은 역설적으로 노무현 정권에 대한 미국의 불신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심 정보를 한국에 주지 않았는데, 이는 우리에게 준 정보가 얼마 뒤 북한으로 흘러들어 간다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한국과의 정보 공유에 소극적이었다. 대북 군사정보의 90% 이상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안보 현실에서 미국으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안위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MB와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한·미 관계가 복원됐다고 자평했다. MB의 시각도 다르지 않았다. MB는 회고록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한·미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한·미 관계의 복원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의 입장에서도 시급한 현안이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 집권 당시 부시 대통령 주변은 ‘네오콘’ 일색이었다. 네오콘은 공화당 중심의 신보수주의자들이다. 이들은 국제사회의 선(善)을 지키기 위해 타국의 국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 같은 기조 덕분에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부시 정권이 대북 문제에서 햇볕정책을 계승한 노무현 정부와 미묘한 마찰을 겪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전 수석과 MB는 이전 정권의 과오 때문에 한·미 관계가 어려워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부시 대통령 보좌진의 증언과는 다소 온도차가 있다. 노 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만난 8차례의 정상회담 중 5개 정상회담을 총괄한 마이클 그린 전 백악관 동아태 선임보좌관은 2008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만난 수십 명의 정상 중 가장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국내를 의식한 반미 발언으로 미국을 당혹시켰지만 한미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친미 대통령이었던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물론 네오콘 성향이 짙은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은 회고록에서 노 전 대통령이 “반미적이며, 아마도 다소 정신이 나간 인물”이었다고 비판했다. 반면 MB에 대해선 “현실적이고 친미적”이라고 칭찬한 뒤 괄호를 넣어 노 전 대통령을 언급하면서 “(노 전 대통령이) 아시아의 최대 안보 위협은 미국과 일본이라고 밝혔다”고 했다.
# 천안함 피격
2010년 3월 26일 밤 10시경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다.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우리 해군 초계함이 침몰했다.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고 6명이 실종됐다. 이 전 수석은 청와대 지하 벙커(국가위기관리상황실)의 긴박했던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2010년 3월 30일 천안함이 침몰한 백령도 사고 해역에서 SSU대원들이 수색작업을 펼쳤다. 일요신문 DB
“청와대 근처에서 지인들과 저녁을 먹고 퇴근하던 중 김희중 청와대 부속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 실장은 ‘북한과 관련해 중대 사안이 발생했습니다. 긴급 외교안보장관회의가 소집됐으니 빨리 지하 별관 벙커로 와 주셔야겠습니다’고 했다. 일명 워룸(War Room)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10여 분 뒤 위기관리센터 내 상황실에 들어서니 마침 이 대통령이 정정길 대통령실장, 김성환 외교안보수석 등과 함께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MB 역시 충격을 받았다. 회고록에서 MB는 “김성환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다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소집했다”며 “나는 급히 청와대 지하별관의 상황실로 이동했다. 상황실로 가면서 ‘북한이 일을 저지른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뇌리를 스쳤다”고 회상했다.
청와대 지하 벙커는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들었다. 대통령이 전시 상황을 총괄 지휘하는 장소로 북한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대형 방공호에서 시작됐다. 이 전 수석의 당시 지하벙커 묘사에 따르면 40평 가까운 상황실 전면 벽에 설치된 10개의 대형 TV 모니터에 천안함 침몰 현장의 주변 해역 상황과 좌표, 지진파 등 관련 데이터가 표시돼 있었다. 육해공군의 작전사령부와 경찰청, 소방본부, 한국전력 등 국내 20여 개 주요 기관으로부터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모든 정보가 집중되기 때문에 현장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두고 극심한 갈등이 일었다. MB는 “보수 측은 ‘북한의 소행이 분명한데도 왜 정부가 그 사실을 발표하지 않느냐’고 비판했고 진보 측은 ‘증거도 없이 왜 북한 소행으로 몰아가느냐’고 공격해댔다”며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갈등도 고조됐다. 초조하고 안타까웠다”고 설명했다. 이 전 수석 역시 “암초에 의한 좌초, 노후로 인한 피로 파괴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제기됐다”고 회상했다.
2010년 5월 20일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등 5개국 합동조사단은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발표 뒤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국방부가 사고 원인과 북한 잠수정의 크기에 대한 발표를 번복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MB는 “5월 15일 쌍끌이 어선이 폭발 지역 인근 해역의 바닥에서 다섯 개의 어뢰 잔해를 발견했다”며 “북한이 독자 개발해 이란과 중남미 등 해외로 수출 중인 CHT-02D 어뢰의 잔해로 밝혀졌다. 어뢰 추진체 내부에서 ‘1번’이라 써진 글자도 발견됐다. 우리 정부가 입수한 북한의 어뢰설계도와 일치했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이 전 수석 역시 “‘1번’이라는 글씨는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형 잠수정의 소행이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였다”고 결론지었다.
# 연평도 포격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경 북한은 대연평도를 향해 170여 발의 무차별 포격을 퍼부었다. 이 포격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해 4명이 사망했고 1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각종 시설은 물론 가옥도 파괴됐다. 휴전협정 이후 북한이 우리 영토를 직접 타격해 민간인을 공격한 일은 처음이었다. 이 전 수석은 북한이 연평도를 공격할 당시 MB가 북한에 대한 원점 타격을 지시했지만 ‘군 수뇌부의 반대’ 때문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응공격을 하라’고 지시했지만 회의에 참석한 군 관계자들은 ‘동종 동량’의 무기로 반격해야 한다는 유엔사 교전수칙을 앞세워 도발 원점인 북한 황해도 개머리반도의 해안 포진지를 타격하지 못했다. 대신 K-9 자주포로 북한 무도 일대의 포진지에 80발을 응사하는 데 그쳤다.”
이동관 전 수석이 지난 15일 열린 ‘도전의 날들’ 출판기념회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 최준필 기자
비록 회고록이지만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대목이다. 국군 통수권자인 MB가 연평도 포격에 대해 적극적으로 응전하지 못한 것을 ‘군 수뇌부’ 책임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기 때문. 더구나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포격 이튿날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확전 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답했다. 대통령의 지시를 두고 이 전 수석과 국방부 장관이 상반된 입장을 보인 것.
이 전 수석은 “연평도 상공까지 출격했던 F-15 전투기 두 대를 활용해 공격을 가하라는 이 대통령의 지시에 대해서도 군 관계자들은 ‘미군과 협의할 사안’이라며 행동에 나서는 것을 주저했다고 한다”며 “오히려 민간인 출신 장관 수석들이 적극적 대응을 요구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나중에 확인해보니 출격한 F-15 전투기 두 대에는 공대지미사일이 장착조차 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민감한 내용도 보탰다.
이 내용이 알려지자 나승룡 국방부 부대변인은 <뉴스1>과의 인터뷰를 통해 “군은 국가안보의 초석이다. 당시 부여된 상황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며 “당시 공대지 미사일을 장착하지 않은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게 아니라, 작전의 효율성상 초계전력에는 대체로 공대지 미사일을 탑재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야당 국회의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육군 사령관 출신 새정치민주연합 백군기 의원은 “이 전 대통령과 이 전 수석의 주장에 대해 모멸감과 분노를 느낀다”며 “대통령은 군을 움직일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지녔다. 군은 상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조직이다. 연평도 포격전 당시 우리 군의 대응도 대통령의 최종 명령에 따른 것일 뿐, 독자적인 판단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 전 수석은 논란을 의식한 듯, 출판기념회가 끝난 자리에서 “군 지휘부가 지대공 미사일 타격에 대해 주저 반응을 보인 건 사실이다. 국토가 공격을 당했을 때 자위권은 교전수칙을 뛰어넘는 권리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군이 평화무드에 적응해 전투의식이 희박해졌다. 이 점을 지적한 것”이라며 “이번 목함 지뢰 사건도 그렇고 도발시 우리가 원점 타격해야 하는 것은 교전수칙을 넘어선 개념이다. 자위권 차원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
MB 군에 대한 깊은 불만 왜? 연평도 대책회의 불구 국방장관은 국회 출두 이명박 전 대통령(MB)과 이동관 전 홍보수석의 회고록은 공통점이 있다. 군 지휘부의 대응에 아쉬움을 표했다는 것. 지난 15일 이 전 수석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MB는 “이 책이 아주 정직하게 쓰였다”며 극찬했다. MB 회고록을 출판하기 위한 고정 멤버였던 이 전 수석은 “대통령 회고록 작업이 끝낸 뒤 정본이 만들어졌으니까 그걸 보완하는 책을 쓰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2010년 11월 23일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의 서해 연평도 포격 도발과 관련, 합동참모본부 지휘통제실에서 대책 논의를 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두 사람이 서로의 회고록에 깊게 관여하며 ‘사전조율’을 끝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 이 전 수석은 류우익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등과 함께 친이계의 대표주자다. 이 전 수석은 책에서 연평도 포격은 물론 천안함 사건 당시 군 수뇌부가 북한 잠수함의 공격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하고 경계 태세를 완화했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 “천안함 피격 수일 전 감시 중인 북한 잠수정이 레이더망에서 사라졌다는 미군의 정보까지 파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폭침 한 달 전 합동참모본부는 ‘적의 특이한 침투 도발 징후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경계태세를 완화했다. 해군작전사령부와 제2함대사령부 역시 서북해역에서 북한 잠수함의 공격 가능성을 가정한 함정 운용구역의 확대, 추가전력증강 등의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해상 전 위주의 기존 작전방식만을 고수했다.” MB 역시 회고록에서 연평도 포격 직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연평도 포격을 위한 대책 논의를 계속하고 있는데 국방부 장관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 했더니, 김태영 장관이 국회에서 답변하느라 오지 못한다고 했다. 전쟁에 준하는 비상사태였다. 상황을 주도해야 할 국방부 장관이 국회 질의 때문에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 우리 군이 갖고 있던 안보의식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군통수권자인 MB가 군 수뇌부를 통제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면피’하기 위해 이 전 수석과 함께 회고록에서 변명을 하고 있는 걸까. 전자든 후자든 MB는 재임 당시 군수뇌부에 대해 적잖은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