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진의 NBA 진출 문제는 내년으로 연기됐지만 하은주의 귀화설 파문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최근 하동기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은주는 일본에 귀화할 것”이라고 최종 입장을 밝혔다. 하은주가 귀화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동기와 일본으로 떠나는 ‘농구 유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는 까닭을 짚어봤다.
2m가 넘는 여자 농구 선수가 있었다. 경기 도중 무릎 연골 파열로 수술이 불가피해지자 학교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쓸모 없는 몸’이 된 것도 억울한데 다니던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전학을 가겠다고 하자 학교에서는 ‘운동 포기각서’를 쓰면 보내주겠다는 말로 또 한 번 선수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국내에서 오갈 데가 없어지자 선수는 일본으로 향했고 장래성을 높이 산 현지 고등학교에서 물심양면으로 재활훈련을 도와준 덕분에 2년 후 다시 농구코트에 서게 됐다.
대학 졸업연도인 올해 일본 실업팀 입단을 앞두고 이 선수의 귀화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외국(한국) 국적을 갖고 실업팀에 들어갈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선수의 눈부신 활약에 화들짝 놀란 국내 농구계에서 ‘애국심’을 볼모로 다시 돌아올 것을 종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선수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게 정당한 것인가.
이상이 하은주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간략한 스토리다. 하은주는 일본에서 실업팀 선수로 뛰기 위해 귀화를 고려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국여자농구연맹은 ‘전력 누수’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하은주에게 최고 대우를 약속하며 한국으로 돌아와달라고 매달리고 있다.
하은주가 귀화할 경우 일본 대표선수로 뽑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자칫하면 국제대회에서 일장기를 달고 한국 선수를 상대하는 상황도 예상된다. 한국여자농구연맹은 한국여자프로팀에서의 최고 대우는 물론, 하은주가 평소 꿈꿔왔던 WNBA(미국여자프로농구) 진출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을 약속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 명예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하은주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버림받은 나라’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게 현재의 입장이다. 일본에 처음 갈 때만해도 누구 하나 관심 두지 않았던 ‘과거사’가 하은주한테는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친 하동기씨는 국내 농구계의 분위기 때문에 몇 차례 귀국을 종용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은주는 “내가 누굴 위해서 한국에 가야 되는 거냐”며 완강히 거절했다고 한다. 하씨는 “은주한테는 일본이 살아갈 의미를 제공해준 나라다. 은주가 다시 운동할 수 있게끔 도와줬고 학업과 관련해서도 큰 만족을 제공해줬다. 지금 은주한테는 돈보다 자기가 쌓은 터전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하씨는 하은주의 귀화 문제가 곧바로 일본 대표선수로 확대 해석되는 부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대학 졸업 후 실업팀에서 뛰고 싶은 순수한 동기만 있을 뿐 지금 당장 일본 대표 선수가 될 수 있을지 여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
하은주는 현재 교생실습중이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은 한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생각에 흔들림이 없다고 한다.
한편 한 국내 농구 관계자는 “현재 일본에선 하은주 말고도 국내 중·고등학교 학생들 중 상당수가 유학생 신분으로 농구코트를 누비고 있다”고 밝혀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만약 이 일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일본에서 농구를 배운 한국 선수들 중 하은주처럼 일본으로 귀화하기를 희망하는 선수들이 계속 나타날 수도 있다는 예상 때문이다.
농구인 A씨는 “한두 명이 아니다. 수십 명이 일본에서 유학중인 걸로 알고 있고 직접 내 눈으로 보기도 했다”면서 “일본은 운동선수라 할지라도 학교 수업을 모두 마친 이후에 훈련을 하기 때문에 만약 농구선수로 성장할 수 없게 되더라도 일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일본 유학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국내 선수들이 중·고등학교 때 유학을 떠나려는 이유도 학교 수업과 훈련을 병행하는 일본의 수업 방식에 적응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과 낯선 환경, 공부와 운동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려면 나이가 어릴수록 유리한 면이 있지만 반면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게 A씨의 설명.
또 다른 농구인 B씨는 “지금 당장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이런 현상을 그냥 방치할 경우 한국여자농구는 세계 4강에 들어가기도 힘들어진다”면서 “연맹에선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