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본격적으로 국내대회가 시작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지만 흥행은 대성공이다. KBS스카이, 스카이라이프 등을 비롯해 중계권계약이 줄을 잇고 입장권은 연일 매진사례다. 관계자들조차 예상치 못한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이종격투기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살펴봤다.
이종격투기 경기가 벌어지는 날 두 경기장의 선수대기실은 전쟁터의 ‘부상병동’을 방불케 한다. 룰이 없는 경기이다 보니 부상자가 속출하고, 피를 흘리는 경우는 다반사다. 때문에 선수대기실의 핏자국은 부지기수.
코뼈가 내려앉거나 정강이 골절상을 당한 선수, 아예 탈진한 채 쓰러진 선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웬만한 부상을 당해도 예선전의 경우 하루에 2∼3경기씩 치러야 하기 때문에 병원에 달려갈 수는 없다. 간단한 응급처치만으로 출전을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선수대기실에선 살벌한 분위기가 펼쳐진다.
경기를 끝낸 부상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선수들이 출전 준비를 한다. 김영철(24)은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피를 보면 몸이 적당히 긴장되고 승부욕이 불타오른다”고 말했다.
이종격투기는 깨물기나 눈 찌르기 등 몇 가지 제한을 제외하면 사실상 룰이 없는 경기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무도인들은 “싸움과 다를 게 뭐냐”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인천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문재 관장(태권도 5단)은 “흥미위주의 경기로 사실상 무도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고, 승부가 과열되면서 거의 모든 경기가 쓰러진 패자를 올라타고 앉아 두들기는 것으로 승부가 나는데, 사실상 싸움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연일 만원 관중을 만들어내는 데는 ‘룰 없이’ 원초적 투쟁욕구를 자극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임은 부인할 수 없다. 경기 중 선혈이 낭자한 선수들의 치고 받는 모습을 보면 관중석은 후끈 달아오른다.
자신도 모르게 기합을 넣고, 주먹을 내지르는 팬들도 적지 않다. 이종격투기 팬인 직장인 나홍상씨(36)는 “어려서부터 무협지를 좋아했다.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이종격투기 경기를 보면서 짜릿한 쾌감을 느끼고 대리만족을 한다”고 말했다.
이종격투기 경기는 의외로 기권패가 많다. 기권패의 경우 선수가 직접 기권의사를 표시하거나 코칭스태프가 링 안으로 수건을 던지는 것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코칭스태프가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기권의사를 표시해도 선수가 이를 부정하기도 한다. ‘쓰러질 때까지’ 싸우려는 파이팅 때문이다.
또 격렬한 만큼 부상으로 인한 기권패도 적지 않다. 고수들이 예선전을 거치면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경기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도 속출한다. 이종격투기 관계자들은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는 실력과 더불어 운도 따라야한다고 입을 모은다.
심판들도 곤욕을 치른다. 현재 각 이종격투기대회 주최측은 무도 고수들을 대상으로 전문 심판들을 양성중에 있는데, 경기에 나서면 2∼3경기에 한 번은 선수들의 헛발질에 맞고 나가떨어진다. 또 한 선수가 일방적인 공격을 받아 경기중단을 선언했을 경우엔 패한 선수가 “싸울 수 있는데 왜 중단시키냐”며 대결 상대를 바꾼 듯 대들기도 한다.
규칙도 제한도 없는 이종격투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고등학생부터 46세 중년 선수까지 나이와 직업이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링 위에서는 모두 동등한 ‘전사’일 뿐이다. 태권도 무에타이 킥복싱 유도 유술 등 무도 고수들이 대부분인데 본업이 따로 있는 선수들도 눈에 띈다.
유도와 레슬링 실력을 바탕으로 이종격투기 무대에 뛰어든 유태랑씨(32)의 직업은 만화가다. 이종격투기를 소재로 한 만화
지난 8월 ‘등용문 대회’에 출전한 정병일씨는 만 46세에 신장은 162cm로 최고령 최단신 선수로 기록됐다. 스피릿MC 와일드카드로 올 9월 대회에 출전하는 서철씨(23)는 폭행사건 등에 연루돼 4년간이나 철창신세를 졌던 아픈 과거사가 있다.
아마추어가 출전할 수 있는 이종격투기 경기예선에는 뒷골목에서 주먹깨나 썼다는 소위 ‘어깨’들도 가끔 눈에 띈다. 하지만 예선을 통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뒷골목 전투와 링 위의 대결은 ‘하늘만큼 땅만큼’ 차이가 있다는 게 ‘이종격투사’들의 얘기다.
아직은 태권도 택견 등 국내 전통무예계 고수들의 출전은 미미하다. 택견의 한 ‘달인’이 최근에야 출사표를 던졌을 정도다. 무예계 내에 이종 격투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데다 출전했다가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망신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한 전통무예 관계자는 “다른 곳도 비슷하지만 출전할 경우 사실상 협회와는 인연을 끊어야 한다. 이 때문에 출전을 생각하는 고수들도 입을 다물고 있고, 협회 입장에서는 다른 무술과 실전 대결을 벌이는 것도 부담인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이종격투기가 인기가도를 달리면서 우승상금은 3천만원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별도의 직업이 없이 이종격투기 선수로서 생활에 전념하는 데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뒤따른다.
국내 이종격투기 초대 챔피언인 이면주(27)조차 “부상 치료 등에 상금을 쓰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면주는 이종 격투기에 전념하고자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둔 상태다. 이면주는 지난 4월 대회에서 결승전 직전에 허리통증으로 인근 병원에서 1시간 전까지 진통제를 맞고 경기를 치렀고, 경기가 끝난 뒤 곧바로 병원으로 직행하기도 했다.
또한 주로 흥행에만 신경을 쓰는 탓에 항상 뒤따르는 부상 위험에 대한 대비책도 아직은 미비하다. 대부분의 출전 선수들이 경기 중 당한 부상을 자비로 치료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선수들의 불만이 잇따르자 스피릿코리아측은 지난 8월 LG화재와 보험계약을 맺어 상해시 최고 5천만원을 보장받도록 했다.
이종격투기 열풍이 일면서 최근엔 여러 단체에서 이종격투기라는 이름으로 각종 대회를 창설하고 있다. 스피릿MC, 세계이종격투기연맹대회(WKF), 네오파이트대회, 스크라이킥 등 대회가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채 인기에 편승하려는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문제점도 노출되고 있다. 선수보호나 이종격투기의 발전보다는 수익에만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실제 일부 대회 주최측은 출전 선수들에게 10만원 내외의 참가비를 받고 있으며, 관중 입장료로 평균 3만원, 로얄석의 경우 5만원을 책정,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또 몇몇 대회가 케이블 방송 등과 고액의 중계권료 계약을 맺은 것도 업체에서는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는 부분.
현재 이종격투기가 가장 활성화된 일본에서 한국시장에 관심을 갖고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이종격투기는 앞으로 대한해협을 오가며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안순모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