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자유계약선수가 되는 정수근은 구단에 대 한 실망이 커져 “무조건 두산을 떠날 것”이라 고 선언했다. ‘몸값’은 30억원 이상은 받아 야 겠다고.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올해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리는 정수근(26)은 “무조건 두산을 떠날 것”이라고 말하면서 ‘몸값’에 대해서는 한참 생각을 거듭하다가 30억원이란 액수를 어렵게 제시했다. 옮기고 싶은 팀에 대해서는 ‘4강에 올라갈 수 있는 팀과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팀’이라고만 대답한 뒤 이미 삼성 코치로 확정됐지만 만약 선동열 전 한국야구위원회 홍보위원이 두산의 새 사령탑을 맡은 뒤 잔류를 요청했어도 두산과는 인연을 끊었을 것이라는 강단을 내비치기도 했다.
정규시즌이 끝나자마자 혼자 부산으로 내려가 해운대 바닷가를 맞대고 앉아 자신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돌아왔다는 정수근. ‘취중토크’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지난 세월의 편린들을 조금씩 꺼내 보이던 그의 진중한 모습에선 ‘다람쥐’ ‘트위스트 정’의 외향적인 이미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수근은 두산에 대한 실망감이 예상외로 컸다. 구단의 경영난으로 인해 스타급 선수들이 다른 팀으로 팔려가고 ‘아버지’로 여기고 따랐던 김인식 감독마저 물러나는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을 두산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9년간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살면서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재미있고 행복했던 날이 더 많았어요. 만약 구단이 선수들을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전 당연히 FA 후에도 ‘두산맨’으로 남았을 거예요. 지금은 그런 신뢰가 무너졌어요. 돈도 중요하지만 마음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거든요.”
지난 10일 정수근의 단골집이라는 잠실야구장 부근의 한 고깃집. 소주와 김치를 곁들인 삼겹살로 ‘취중토크’ 분위기를 한껏 만끽하고 있었던 기자는 정수근의 ‘두산 정 떼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난주 만났던 김인식 감독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두산에서 ‘김인식의 아들’로 불릴 만큼 선배들로부터 부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받았던 정수근한테는 김 감독의 퇴장이 어떤 일보다도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올 시즌은 첫 출발부터 힘들어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시즌 접어들자마자 9연패, 8연패의 늪에 빠지다보니 전혀 여유가 없었죠. 어시스트를 받지 못해 타점 올리기도 벅찼어요. 초조하고 불안해지니까 의욕만 앞세웠고 의욕만큼 몸이 안 따라주었어요. 정말 힘든 한 해였습니다.”
시즌 초반 불길함의 단초는 사실 하와이 전지훈련에서부터 불거졌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정수근을 미국 법정에까지 서게 만든 ‘하와이 폭행 사건’이다. 그 일로 인해 김인식 감독의 입지가 좁아졌고 내년부터 두산이 전지훈련을 국내에서 치르게 됐다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었다. 이 부분에서 정수근은 대번 얼굴 표정을 달리했다.
“물론 구단 이미지에 먹칠한 거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 자신을 위해 모든 걸 까발릴 수는 없었어요. 혼자서 ‘독박’ 쓴 거죠. 그래야 저도, 또 팀도 안정을 찾을 것 같아서 어떤 비난도 달게 받을 각오였습니다. 하지만 단지 그 일로 인해 감독님이 잘리고 전지훈련 캠프가 변경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몰아붙이면 솔직히 좀 억울해지죠.”
전날 과음을 해서 술을 자제했던 정수근이 소주를 들이켰다. ‘좋은 경험’이라고만 치부하기엔 ‘하와이 사건’은 그에게 너무 깊은 내상을 안겨줬고 운동선수로 생활하는 동안 계속해서 따라다닐 ‘꼬리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육사 출신인 아버지는 정수근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검도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했을 만큼 실력자였던 아버지는 3형제(정수근의 형은 사업가, 동생은 현대 유니콘스 야구선수다)가 공부만 아는 ‘범생’보단 건강하고 씩씩한 남자이기를 원했고 세 아들 중에서 특히 정수근이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골목대장’ 역할을 도맡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야구를 시작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야구가 앞으로 내 인생을 바꿔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1년에 3백여 일은 밤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 스윙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독종’ 소리를 들을 정도였으니까. 그 덕분에 덕수상고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1번타자 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
정수근은 야구를 통해 부와 명예를 얻어 ‘폼나게’ 살고 싶었다고 한다. 야구 방망이를 처음 잡았을 때 야구가 자기 인생을 변화시켜줄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노력한 덕분에 2003년 10월 현재 정수근은 목표 달성을 목전에 둔 설레임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 인생을 계단으로 생각했어요. 정상까지 한 번에 올라가기는 너무 힘들기 때문에 순서대로 차근차근 노력해서 올라가자는 게 신념이었죠. 야구는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타나요. 일반 팬들은 정수근이 마냥 까불고 노는 데에만 정신 팔려 있는 줄로 알고 있어요. 야구판이 어떤 곳인데요. 공짜가 없는 곳이에요. 정말 죽을 둥 말 둥 열심히 했어요.”
정수근은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1년에 시즌 끝나고 서너 차례 과음을 할 뿐 평소 술을 즐겨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담배도 3년 전에 처음 피웠다고 한다. 중간에 몇 번 끊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술과 담배를 멀리 했던 이유는 야구를 잘하기 위해서였단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한 빚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 이후부턴 정신 바짝 차리고 야구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가슴 절절한 고백들이 이어졌다.
“야구 그만두면 초등학교에서부터 지도자 생활을 하고 싶어요. 프로 코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린 선수들이 ‘쫄지’ 않고 자유스런 사고와 행동으로 선진 야구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에러가 나오거나 삼진으로 물러나면 경기 결과보다는 나중에 감독한테 두들겨 맞을까봐 더 걱정했던 때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들었어요. 야구가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울 수 있는가를 제가 직접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싶어요. 그래서 전 돈 많이 벌어놔야 해요.”
스물여섯의 나이에 벌써 네 살배기 아들을 둔 탓일까. 정수근은 외향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인생의 깊이와 넓이를 알고 있는 듯한 성숙함을 물씬 풍겼다. 소주 한 병으로 끝난 ‘취중토크’였지만 정수근의 이야기는 소주 서너 병을 마신 듯한 취기와 감동을 안겨주었다. 머리에 줄을 낸 헤어스타일만 빼놓고는 참 괜찮은 남자였다. 정수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