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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953년 부산 시절 정주영 회장 가족사진. 원안에 정회장과 미망인 변중석씨,세살인 정의원 | ||
무소속 정몽준 의원이 출생의 비밀과 관련해 그동안 언론에 밝힌 입장들이다. 월드컵 이후 지지도가 수직 상승한 그는 9월17일 마침내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제 정 의원은 국민과 언론으로부터 과연 대통령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이 있느냐는 혹독한 검증의 관문 앞에 스스로 섰다.
‘인간 정몽준’에서부터 ‘대선 후보 정몽준’까지 검증 대상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출생의 비밀도 그중 하나다. 물론 이 문제는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는 시각이 만만찮다. 개인 프라이버시에 해당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역대 대선에 출마한 후보의 경우 가계도를 중심으로 사돈의 팔촌까지 따져왔던 한국적 정치현실을 감안할 때 정 의원의 출생문제도 같은 차원에서 짚어볼 수 있다. 다만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대선 후보로서 한 인물을 바라보는 통과의례로 보는 게 옳을 듯싶다.
〈일요신문〉은 출생과 관련해 정치권에 떠돌던 온갖 루머들을 하나하나 역추적했다. 정 의원의 생모와 관련한 소문이 정치권에 나돌기 시작한 시점은 월드컵이 끝나면서부터다. 정 의원은 월드컵의 열기를 바탕으로 인기가 급상승했고 정치권은 그의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했다.
정치권의 속성상 마타도어식 루머가 그때부터 돌기 시작했다. 바로 정 의원 생모 얘기였다. 가장 먼저 나온 얘기가 바로 국악인 출신 고 안비취 선생(본명 안복식)이 그의 생모라는 것.
〈월간조선〉은 9월호에서 정치권 인사의 전언을 통해 정 의원의 출생비밀을 처음으로 다뤘다. 민주당 한 의원의 말을 빌리긴 했지만 정 의원의 생모가 따로 있다는 얘기였다.
〈월간조선〉은 구체적인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정 의원의 생모로 지난 97년 사망한 국악인 안비취 선생을 들었다. 지난해 정주영 회장이 사망하기 직전 안 선생을 무척 보고싶어했던 것도 이를 설득력 있게 만든 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정 의원은 이를 공식 부인했다. 정 의원은 “아버지가 친하게 지냈으나 나와는 상관없다”고 밝혔다. 안 선생측도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말했다. 친딸 강아무개씨(55)는 “말도 안된다”며 “어머니가 51년생인 그 사람(정 의원)을 낳았다면 55년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의 일인데 (어머니가) 외도를 했단 말인가”라고 펄쩍 뛰었다.
안 선생이 사망하는 날까지 18년간 함께 살았던 수양딸 강아무개씨도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서는 비밀을 다 털어놓는 법인데 유언까지 하신 어머니는 그것과 관련해 전혀 말씀이 없었다”며 세간의 소문을 일축했다. 한편 국악인을 연구하는 한 관계자도 딸들의 진술을 뒷받침하고 있다.
“국악사 연구와 관련해 안 선생을 여러 번 인터뷰했었다. 안 선생은 정재계에 발이 넓고 상당히 정치력이 있는 분이다. 그런 분이 정몽준 의원 생모라면 아마 자서전이나 녹음 형태로 기록 같은 것을 남겨놓았을 가능성이 많다.
또한 정주영 회장이 안비취 선생을 만났다면 1950년대 초반 한국전이 발발했던 시기다. 그런데 그 당시는 안비취 선생이 세상에 이름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그야말로 무명일 때다.
위로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많았는데 어떻게 정주영 회장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안비취 선생이 생모라는 설과 관련해 정치권에서는 “안 선생과 관련된 국악인”“기생 출신”이라는 등의 또 다른 루머도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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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7일 통일축구대회 때의 정의원 | ||
정 의원 생모가 과거 이승만 정권 당시 장관 등 고위인사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던 아무개여인이라는 얘기다. 당시 이 여인은 금융계 인사들을 많이 알고 지냈는데 정주영 회장과는 사업상 알게 됐다는 것.
그러나 이 소문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요신문〉은 당시 관계자들로부터 문제의 여성이 정 의원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앞서 지적한 ‘설’들보다 구체적인 정황이 담긴 소문이 있다.
정 의원의 한 측근으로부터 나온 그의 생모 비밀은 이렇다. 이 묘령의 여인은 명문대를 나온 인텔리 여성으로 상당히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 여인은 서울 명동에서 주단 포목상을 운영하면서 정 회장과 알고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현대건설을 운영하던 정주영 회장이 1953년 4월 착공한 고령교 건설공사가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면서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정 회장은 당시 상황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인부들은 노임을 받지 못해 날마다 파업을 했다.
그때 몽준이는 어린 나이였는데도 그 시절 먼저 생각나는 게 빚쟁이들이 집에 와 도끼로 마루를 쾅쾅 찍으며 돈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치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현대건설은 우여곡절 끝에 고령교를 착공 26개월 만인 1955년 5월에 완공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진 빚을 모두 갚는 데는 그 후로 2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고 한다. 정 의원의 생모로 추측되는 이 여인은 현대건설이 한창 빚으로 쪼들릴 이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돈을 끌어 모아 도와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건설이 계속 부도 위기에 몰리자 빚쟁이들은 정 회장에 돈을 빌려주도록 한 이 여인을 계속 몰아세우며 빚 청산을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 회장은 이 여인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여인은 빚쟁이들의 독촉에 상당한 심적부담을 느껴오다 결국 투신자살했다는 게 이 소문의 요지다.
〈일요신문〉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정 회장 주변 관계자들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상태다. 마지막으로 〈일요신문〉이 포착한 ‘설’은 지금까지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의 모든 소문이 생모의 사망을 전제로 한 것과 달리 다음 소개할 내용은 생모가 살아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영남권 출신으로 알려진 그녀는 20대 초반 정주영 회장을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정 회장이 생존했을 때는 물론 작고한 이후에도 철저하게 얼굴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