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스타일 펴기 ‘미소작전’ 시동
▲ 지난 1일 한나라당 의원총회. 박근혜 대표가 이재오 원내대표와 얘기를 나누던 중 활짝 웃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원내대표 경선(1월12일)-국회 등원 결정(1월30일)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입은 ‘당내 지지기반 축소-대선 후보 지지도 하락’이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부활 플랜’이 박 대표 주변을 중심으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다. 한때 박 대표의 몫인 양 인식됐던 ‘대세론’의 주인공이 라이벌인 이명박 서울시장(MB)으로 바뀐 당 내외 환경에 발맞춰 친박(親朴) 진영에서 5·31 지방선거와 7월 전당대회, 뒤이은 당내 대권 레이스에 대비한 ‘묘수(妙手) 찾기’에 나선 것이다.
친박 진영의 변화는 등원 결정을 전후해 박 대표가 “모든 것을 던질 것”이라며 결기를 보였던 사학법 무효화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에서부터 감지되고 있다. 박 대표는 이재오 원내대표와 열린우리당 김한길 원내대표 간 산상(山上)회담(1월30일)에서 사학법 재개정 논의를 전제로 국회 정상화에 합의가 이뤄진 직후 유정복 비서실장을 통해 “사학법 재개정을 논의한다는 내용을 담은 국회 정상화에 동의한다. 향후 국회에서 심도 있는 심의·처리가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짤막하게 밝혔다.
그동안 박 대표가 주도해 온 장외투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의원들 사이에서 “말이 합의지 사실상 ‘항복선언’”이라는 등의 불만이 터져나온 것과 비교하면 박 대표의 반응은 분명 ‘예상 밖’이었다. 박 대표가 사학법 재개정이라는 ‘확답’을 받지 않고 원내대표 회담결과를 ‘추인’하고 나선 것 자체가 뉴스가 될 정도였고 ‘등원 반대론자’들은 박 대표의 이 같은 태도에 따라 2월1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제대로 주장도 못 펴고 ‘등원론’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실제 박 대표는 이날 의총 발언을 통해 그동안 진행해 온 장외투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기보다 의원들의 노고와 원내대표단에 대한 격려에 치중하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적극 참여해 주신 의원들의 노고에 감사하다”고 운을 뗀 후 “이번 임시국회에서 사학법 재개정을 하는 것만이 유일한 현실적 방안이다. 산상회담에서 재개정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이재오 원내대표께서 고생이 많았다. 원내대표단은 국회 논의과정을 통해 사학법의 잘못된 점을 고치는 재개정을 필히 관철시켜 달라”고 당부한 것이 전부다.
측근들은 사학법 문제에 대해 박 대표가 ‘유연해진’ 배경을 “소신과 현실의 충돌에서 후자가 승리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한 핵심측근은 최근 일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등원 결정을 전후한 박 대표의 고민을 가감 없이 털어놓은 바 있다. 이 측근은 “박 대표 입장에서 볼 때 사학법 장외투쟁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명분과 당위성은 있었지만 투쟁방향 설정에서부터 전략·전술, 당내 역량 분석과 동원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모두 꼬여버렸다. 특히 원내대표 경선에 박 대표와 ‘동일체’로까지 인식되던 김무성 의원이 나선 것은 결정적 실책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평가를 기초로 “박 대표가 손상된 당 내외 리더십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학법 투쟁의 굴레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 마침 윤상림 게이트나 황우석 교수 파문, 국가정보원 도청 사건 등 대여(對與) 공세의 호재들이 널려있는 만큼 박 대표는 이제는 이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여 전선(戰線)이 그려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박 대표도 주변의 이 같은 권고에 영향을 받은 듯 최근 당 운영 스타일에서 확연히 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회의석상에서 발언이 크게 줄었고 특히 사학법과 관련해선 거의 언급이 없다. 지난 2일에도 국회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선 한마디 얘기도 없었고 당내 소장파들이 자신이 신년기자회견에서 밝힌 감세(減稅) 주장을 공개 비판해도 일절 대응에 나서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1월 초만 해도 자신을 “이념적 편견이 병(病) 수준”이라고 비판했던 원희룡 최고위원을 공개회의에서 매섭게 질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대응이다.
장외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투사’ 이미지를 벗고 본래의 온유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동갑내기(52년생)인 신임 열린우리당 김한길 원내대표가 2일 국회 대표실로 예방했을 때 박 대표가 보인 모습은 ‘달라진 박근혜’의 단면을 보여준다.
▲ 사학법 투쟁 과정에서 리더십에 상처를 입은 박근혜 대표가 대반전을 모색하고 있다. 사진 위부터 사학법 무효화 투쟁, 입당한 현명관 삼성물산 회장과 악수, 김한길 열린우리당 신임 원내대표한테 꽃다발을 받는 모습. | ||
예방이 끝난 후 배석했던 한 당직자는 “사학법 파동이 시작된 이후 박 대표가 오늘처럼 환한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다. 장외투쟁 과정에서 몸도 마음도 지친 데다 당 안팎에서 부정적 평가가 많아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박 대표가 이전 페이스를 찾는 것 같아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 대표가 안정을 찾으면서 측근 그룹을 중심으로 ‘상황 반전책’을 찾는 노력에도 속도감이 붙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친(親)MB계를 중심으로 한 비주류의 ‘세(勢) 확대’ 움직임에 맞서 이전의 우호세력을 복원하는 방도를 놓고 내부 논의가 한창 진행중이다. 이제까지의 논의과정에선 △수도권-소장파 중심의 친MB계열에 맞서 영남권-중진그룹들의 지원 확보 △원내대표 경선과정에서 영향력이 강화된 중도 성향 초선들의 견인 △외부인사 영입을 통한 외연 확장 △당 내외 차기 대권주자들과의 연대 등이 집중적으로 거론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측근으로 통하는 한 재선 의원은 “어차피 앞으로 당내 역학구도가 박 대표와 MB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 분명해진 만큼 이제는 연대·제휴의 대상을 보다 분명히 할 때가 됐다. 일단 이완된 당내 지지층의 재결집과 외부 수혈을 통한 지지층의 다양화를 기본 좌표로 삼고 여기에 MB측이 내세운 ‘중도개혁세력 통합론’에 담긴 패권주의적 의도와 ‘MB 대세론’이 갖는 허실도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들 방안 중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역시 당 내외 차기 대권주자들과의 ‘연대론’이다. 이미 유력 차기 대권주자인 고건 전 총리와의 연대 가능성이 양측 외곽그룹을 중심으로 거론되고 있는 데 이어 당내에서는 ‘빅 3’ 중 한 명인 손학규 경기지사와 박 대표가 힘을 합쳐 MB측과 맞설 것이란 관측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손 지사와의 ‘제휴설’에는 박 대표측이 유력 차기 당권 후보로 염두에 두고 있는 김덕룡 의원(DR)의 ‘역할설’이 나돌아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박 대표측의 한 인사는 “박 대표와 손 지사, DR 간에는 인맥지도가 중첩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박 대표의 측근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김무성 의원과 이성헌 제2사무부총장은 DR과 각별한 관계이며 손 지사와도 같은 민주계 출신이라는 점에서 속 깊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사이다. DR과 손 지사 역시 학생운동 선후배에다 김영삼 정권 때 맺은 정치적 인연을 따져 보면 결국은 ‘한 배를 타야 할’ 입장이다. 박 대표-손 지사-DR의 ‘삼각(三角) 동맹’은 지금으로선 ‘MB 대세론’에 맞설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그림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인사는 3자 연대의 구체적인 효과로 “박 대표는 그동안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혀 온 ‘이념적 한계’ 논란에서 한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손 지사와 DR이 갖는 개혁성향이 본의 아니게 ‘강(强) 보수’로 비춰졌던 박 대표의 약점을 보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동안 당내에서 개혁이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 양 내세우며 박 대표에 날선 비판을 해왔던 소장파들의 공세를 막는 데도 적지 않은 효험을 거둘 수 있으며 이들이 개혁을 내세워 MB 지지를 유도하는 것을 방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손 지사 진영에선 박 대표와의 연대 여부에 대해 “대권을 목표로 노력중인 만큼 지금으로선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면서도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 두지는 않고 있다. 한 측근은 “MB가 대세론이 거론될 만큼 앞서가니까 전체적인 당내 대권 경쟁 구도에서 (박 대표와의 연대설이) 나오는 것 같다”며 “(연대의) 성사 여부를 떠나 손 지사와 박 대표, DR이 이런저런 인연을 바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이인 것은 맞다. 앞으로 세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정리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외부인사 영입을 통해 당 내외 기반을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눈여겨볼 포인트다. 대표적인 친박 중진인 김형오 인재영입위원장이 총괄하고 있는 영입작업을 통해 친MB계 인사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는 서울시장·경기지사 당내 경선에 변화를 꾀하고 다른 한편으론 이미 영입에 성공한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등 지명도 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우호세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라 하겠다.
특히 MB의 핵심측근인 홍준표 의원과 김문수 의원이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는 서울시장·경기지사의 경우 당내 후보군들의 본선 경쟁력에 대한 논란이 확산될 경우 영입위를 중심으로 ‘영입 불가피론’이 급부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박 대표측으로선 그냥 흘려보낼 하등의 이유가 없는 카드란 분석이다.
박영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