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당선자는 선거기간 내내 ‘원칙과 개혁’을 주장했다. 당선되면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개혁대상은 사회 전 분야다. 정치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 국제관계 등을 총망라한다. 이는 국가 구조(structure)와 시스템(system)의 변혁을 의미하고 있다.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노무현식 혁명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물론 변혁이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으로 보는 이도 많다. 수십 년에 걸쳐 뿌리내린 사회 기득권층의 저항이 만만찮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사회의 큰 흐름은 ‘변화’쪽으로 흐르고 있다. 정치적 기반이 약한 평범한 정치인이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상, 기존의 틀을 깨는 탈바꿈이 없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도층과 힘의 원천을 의미하는 ‘권력’의 이동(POWER SHIFT)도 이미 시작됐다. 동시에 노무현식 혁명을 위한 권력투쟁도 시작됐다.
▲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 ||
노 당선자의 이 같은 입장은 이미 예견돼왔다. 그는 그동안 정치개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지난 6일 부산의 한 유세장에서 그는 “내가 대통령이 되면 민주당은 노무현당이 된다”고 말했다. 이는 민주당에 대한 영남 유권자들의 반감을 상쇄시키기 위한 전략적 발언 정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정치개혁이라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노 당선자는 11일과 17일에도 이와 유사한 발언을 했다. 특히 17일 발언은 의미심장했다. 그는 “지역과 계층, 이념의 측면에서 국민이 우려하는 반쪽 짜리 정당은 하지 않겠다. 민주당의 문호를 개방해 취임 전까지 환골탈태의 가시적 모습을 보이겠다”며 ‘창당’수준으로 발언수위를 높였다. 이 때문에 ‘대통령 당선자 노무현’을 바라보는 정치권은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당선자를 배출한 민주당은 발전적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고, 패배의 쓴 잔을 마신 한나라당은 쇄신의 블랙홀로 빠져들고 있다. 형식이야 어찌 됐던 각 당은 변화된 정치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을 견뎌내야만 한다. 문제는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어야 할 사람들이 누군가에 대해서도 정치권은 대충 짐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희생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다. 정치적 기반이 확고한 기존 정치인이 자기 밥그릇을 그저 내놓을 리 만무하기 때문.
하지만 정치권의 ‘환골탈태’는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정치권은 정계개편의 태풍(政風)이 ‘노무현신당’으로 비롯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물론 노 당선자는 20일 당선자 기자회견에서 정계개편에 대해 기존 입장과 달리 말을 아꼈다. 그는 “대통령에겐 정계개편을 할 힘이 없다. 가능하지도 않고, 할 의사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국민의 개혁요구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현실”이라면서 “지역주의 해소 과정에서 정치가 불안한 동요의 상태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며 정치권에 휘몰아칠 소용돌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이를 뒷받침하듯 민주당 조순형 정동영 신기남 의원 등 개혁파 의원 23명은 지난 22일 기자회견을 열고 개혁신당 가능성을 예고했다. 이들은 “낡은 정치의 틀을 깨기 위해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제안한다”면서 “김대중 정권의 부패와 실정에 책임 있는 사람은 책임을 져야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는 당내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동교동계와 ‘반노무현’ 세력인 후단협 소속 의원들의 퇴장을 선언한 것이었다. 지목을 받은 의원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화합해야 할 이때 벌써부터 인적청산을 외치는 것은 당선자에게도 좋지 않다”면서 “당선자 주변 인사들이 너무 설친다”며 심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개혁파 의원들의 행진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3명 중에는 선대위에서 노 당선자 측근으로 핵심역할을 했던 의원들이 다수 포함돼 있어, 이들이 노 당선자의 정치개혁 프로그램을 최전방에서 주도할 ‘추진체’역할을 할 것으로 정치권은 해석하고 있다. 이들은 당내 반발까지 염두에 둔 개혁신당 시나리오까지 구상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웅 의원과 유시민씨가 맡고 있는 ‘개혁적 국민정당’을 개혁파트너로 삼고 정치변혁을 본격화할 것이라는 주장도 급부상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일부 개혁파 의원은 물론 영남권에 기반을 둔 중도파 인사까지 신당에 참여시킨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노 당선자는 정치질서 재편 수단으로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 선거법 개정 의사도 피력했다.
그는 23일 “2004년 총선에서 지역 편중성을 극복하고 과반을 점한 정당이나 정당연합에 국무총리 지명권을 넘기겠다고 말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밝혔다. 2004년 총선을 1차 마감으로 하는 거대한 정치개혁 프로젝트가 이미 시작된 분위기다.
‘노무현 혁명’은 행정수도 이전 공약에서도 보여주듯 행정의 전분야에서도 점쳐지고 있다. 행정수도의 이전은 지방분권화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미다. 또 헌법상 총리의 실질적 권한을 보장하는 ‘책임총리제’실시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과거 정권에서 형식적으로 지켜왔던 총리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부여하겠다는 뜻이다.
국가정보원의 변화도 예고된다. 그는 국정원의 국내사찰을 금지하고 해외업무에 충실토록 하기 위해 해외정보처로 이름을 바꾸겠다고 했다.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 신설, 교육부 기능 대폭 지방이양 등도 예상된다.
경제, 사회분야의 변혁도 기대된다. 노 당선자의 경제분야개혁의 핵심은 재벌개혁이다. 그는 “재벌은 재벌이고 대기업은 대기업”이라며 경제행위 주체로서 대기업은 인정하되, 재벌의 폐해를 없애는 쪽으로 개혁프로그램을 추진할 작정이다. 출자총액제한 유지, 완전포괄 과세 도입 등이 주요 내용이다. 아울러 그는 주5일제 근무 확대, 호주제 폐지, 고교평준화 유지 등 서민층의 입장을 강하게 대변할 것으로 보인다.
언론분야 개혁에는 파란이 예상된다. 언론개혁 의지가 강한 노 당선자는 “편집의 자유와 독립 및 경영투명성 강화 등을 위해 언론관련 법제를 정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언론사의 소유형태 변화와 신문고시 강화, 신문공동배달제 실시, 언론피해 구제제도 강화 등이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시대’의 또다른 변화는 외교분야에서도 점쳐진다. 외교전문가들은 노무현 정권이 ‘자주 외교’를 화두로 삼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특히 대미관계에서 더욱 그렇다. 노 당선자는 평소 “사진 찍으러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해왔다. 노 당선자측은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과 한나라당 모두 패했다고 보고 있다. 대신 국민의 이름으로 “노무현이 당선됐다”는 입장이다.
사회 주도세력으로 부상한 2030세대와 개혁성향 40∼50대의 국민적 지지기반을 통해 ‘노무현 혁명’이 향후 5년 동안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