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식구 대접하다 제 식구만 잃었다
▲ 이원종 충북지사(왼쪽)와 김태환 제주지사가 돌연 탈당을 선언해 한나라당 지도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들은 당 지도부의 외부인사 영입에 반발해 탈당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전선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 ||
당 소속 현직 광역단체장들의 연쇄 탈당에다 최연희 전 사무총장의 <동아일보> 여기자 성추행 사건과 뒤이은 탈당, 전여옥 전 대변인의 ‘DJ(김대중 전 대통령) 치매노인’ 발언 등 ‘돌발 악재’가 연발하면서다. 여기에 여권이 현직 장관 등 외부 인사들을 대거 ‘징발’하는 등 총력전을 펼치고 나서면서 “16개 광역단체장 중 12곳 이상 승리할 것”이라던 당초의 호언장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잦아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상 기류’는 우선 당 지도부의 ‘무신경’ 탓에 이원종 충북지사, 김태환 제주지사 등 현직 단체장들이 탈당을 선언, ‘낙승’을 기대했던 두 곳의 선거 전망이 불투명해진 것에서 드러난다. 특히 충북과 제주는 단체장만 한나라당이 차지했을 뿐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전체 의석을 독식한 곳들이어서 탈당의 여파는 그만큼 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70%를 웃도는 지지율을 기록, 무난히 ‘3선 고지’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던 이원종 충북지사가 지난 1월 4일 돌연 탈당·불출마를 선언하고 나선 것은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가도가 험난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이 지사는 공식적으론 “호남고속철 오송분기역 유치 등 지역 현안이 모두 해결돼 뿌듯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게 됐다. 충북의 미래를 위해 훌륭한 인재를 새로 뽑아 키워야 한다. 적절한 때 명예로운 퇴장이 평소 소망이었던 만큼 이제 어떠한 공직에도 나서지 않고 평범한 사람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자신의 결심 배경을 밝혔다.
그러나 이 지사의 전격적인 탈당·불출마 결정의 실제 이유는 당 지도부와의 ‘불화’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양측 간에 갈등이 빚어진 것은 당 지도부 주변에서 이 지사의 잦은 당적변경 전력을 문제 삼아 ‘공천 불가론’을 유포했다는 소문이 발단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사는 98년 지방선거 직전 한나라당을 탈당, 자민련 후보로 당선됐다가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다시 자민련을 탈당해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가뜩이나 당 지도부의 비우호적 태도에 불만을 가져온 이 지사가 결정적으로 ‘작심’한 데는 지난해 9월 21일 정우택 전 해양수산부 장관(15·16대 의원)이 한나라당에 입당, 충북지사 선거에 도전하겠다고 밝힌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장관의 입당에 지도부가 ‘반색’을 하고 정 전 장관 측도 도지사 공천을 내락 받은 양 활동하고 다닌 것이 이 지사 측을 격분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지사측이 이처럼 ‘반(反) 한나라당’ 행보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면서 ‘한나라당 공천=당선’으로 여겨졌던 선거판도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의 경우 정 전 장관과 한대수 청주시장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반면 열린우리당은 한 전 부지사로 사실상 후보가 단일화된 데다 이 지사의 후원을 등에 업은 한 전 부지사가 꾸준한 상승세를 보여 승패를 점치기가 어려운 상황이란 평가가 나오고 있다.
김태환 제주지사의 탈당도 당 지도부의 미숙한 대응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004년 6·5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김 지사는 지난 2월 15일 한나라당을 탈당한 데 이어 2월 23일엔 제주지사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김 지사는 당초 탈당과 함께 불출마 입장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지지자들의 반발과 한나라당에 대한 배신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재선에 도전키로 마음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재임기간이 2년여에 불과한 김 지사가 탈당이라는 극약처방을 사용한 것은 당 지도부가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을 제주지사 후보로 사실상 영입한 데 대한 반발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 김 지사는 ‘탈당의 변(辯)’으로 “한나라당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현직 지사가 있는데도 다른 도지사 후보를 영입하면서 사전에 협의는 물론 통보도 없었다. 현직 도지사로서 모멸감을 느꼈다. 과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민 지지도가 낮은 것도 아닌 가운데 중앙당이 하는 정치적 상황은 개인의 자존심이 아니라 도민에 대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고 토로했다.
한나라당은 김 지사의 탈당에 공식적으론 “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는데 자기 나름대로 주관적인 판단을 해 그만둔다니 납득이 안 간다”(최연희 전 사무총장)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 지사 탈당의 ‘후폭풍’이 예사롭지 않음이 확인되면서 긴장하는 분위기다. 특히 김 지사가 불출마하리라 예상했다가 무소속 출마 쪽으로 방향을 잡자 열린우리당 후보가 어부지리를 얻는 ‘최악의 상황’이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최연희 전 사무총장의 성추행 파문과 관련, 여성단체 대표들과 만나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한 당직자는 “지역에서 김 지사에 대한 동정론이 예상외로 폭넓은 반면 영입인사인 현 전 회장의 지지도는 답보 상태를 보이는 등 상황이 좋지 않다”며 “제주의 경우 당 소속 현직 단체장이 있는 만큼 외부영입에 신중을 기했어야 하는데 서두르다 보니 뒤탈이 난 것 같다”고 말했다.
당내에서는 당 지도부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김 지사를 ‘배제’한 것은 그의 전력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김 지사가 전주고를 졸업한 데다 98년 지방선거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된 경력을 지도부가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적 변경을 문제 삼아 갈등을 빚었던 이원종 충북지사와 비슷한 케이스라 하겠다.
이와 관련해 비주류의 한 중진은 “당내에서 선거 승리를 위해 민주당과 국민중심당, 자민련과 공조를 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와중에서 멀쩡한 당 소속 현직 단체장을 전력을 문제 삼아 내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혼자 힘으로 쉽게 이길 수 있는 선거를 지도부가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면서 낭패를 보게 생겼다”고 지적했다. 이 중진은 “충북과 제주의 경우 당 소속 의원이 한 명도 없어 다른 어느 곳보다도 현직 단체장의 프리미엄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라며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느니 ‘외부 인사를 적극 영입해야 한다’느니 목소리만 높이다가 정작 당 안에 있는 인재는 쫓아내는 형국이 되어버렸다”고 지도부를 성토했다.
강원도에선 ‘성풍’(性風)으로까지 불리는 최연희 전 사무총장의 성추행 사건의 후폭풍이 거세게 몰아치면서 판도변화가 일고 있다. 전체적으론 최 전 총장이 탈당에 이어 의원직을 사퇴하는 정도에서 사태가 일단락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강원도의 경우 최 전 총장의 ‘공백’이 예상외로 크게 작용하면서 당면한 지방선거 준비에 비상이 걸린 상태다.
강원도에선 3선인 최 전 총장을 뺀 소속 의원 5명이 모두 초선. 최 전 총장이 선수(選數) 구조상 그리고 사무총장 겸 중앙당 공천심사위원장을 겸직하면서 ‘전횡’이라고 불릴 만큼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만큼 그의 ‘유고’(有故)는 당장 공천과 선거 준비 차질로 이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지역 내 한 초선 의원은 “(성추행 사건으로) 중앙당 차원에서 입은 피해도 피해지만 강원도당 입장에서는 선거를 어떻게 치를지 막막하다”며 “그동안 최 전 총장의 위세에 눌려 기초단체장 공천에서 별다른 논란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공천 잡음’이 불거질 우려가 대두되는 데다 일부 지역에선 열린우리당에 밀리는 경우도 나타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도지사 선거의 경우 다행히 열린우리당에서 외부영입이 여의치 않은 것 같아 한시름 놓고 있지만 최 전 총장 사건으로 전반적인 상황이 악화되면 그마저도 안심할 수 없는 형편”이라며 “잘하면 ‘싹쓸이’도 가능할 것이란 전망을 대폭 수정해야 할 것이라는 얘기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영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