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질 끌수록 불리… 여론 업고 ‘벙커’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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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한길 의원 | ||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이해찬 파문’이라는 악재를 이용해 지지율 상승을 만들어 낸 ‘마술사’로 김한길 원내대표를 꼽는다. 당대 최고의 전략가로 통하는 그는 이 총리 파문에 대해 능동적이고 공세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열린우리당을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지난 1월 24일 원내대표 경선에서 동료 의원들이 그에게 표를 몰아준 이유도 이런 재주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김 원내대표는 이 총리의 골프 파문이 처음 언론에 보도됐을 때 가장 먼저 ‘사퇴 불가피’ 쪽으로 방향을 잡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3일 저녁 정동영 의장 등 여당의 핵심 지도부와 함께 총리 공관을 찾아갔다. 일부에서는 이날 만남에서 고성이 오갔다는 얘기를 근거로 김 원내대표가 이 총리에게 대국민 사과와 함께 사퇴를 요구했다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김 원내대표는 자신이 나선 이유에 대해 “정동영 의장이 나서면 자칫 대권주자 간이나 당내 계파 간의 갈등으로 비칠 수 있어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래서 내가 조금 더 센 발언을 간간이 했다”고 설명했다.
이 총리는 이튿날 대국민 사과와 함께 사의를 밝혔다. 김 원내대표는 이에 대해 “국민 여론을 십분 감안한 결정이라고 이해한다”고 논평했다. 겉으로는 ‘안타깝다’는 표현도 있었지만 ‘당연하다’는 뉘앙스가 강했다. 6일 저녁 원내대표단이 김원기 국회의장의 초청으로 의장 공관에 모였을 땐 후임 총리 문제가 화제였을 정도로 ‘진도’가 나가 있었다.
이 총리의 향후 거취 문제를 놓고 재야파와 친노 그룹을 중심으로 신중론이 제기되자 이를 ‘제압’한 것도 김 원내대표였다. 그는 의장·원내대표·최고위원 명의로 소속 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선당후사’(先黨後私)를 강조하며 개인 의견을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우상호 대변인은 “당 지도부의 요청에 한 사람도 이탈하지 않고 단일대오를 형성한 점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성과”라며 “창당 후 지도부와 소속의원, 당원들이 혼연일체가 돼 정국 현안에 일사분란하게 대처한 것은 이번이 처음 같다”고 평가했다.
이 총리 측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지난 8일 리서치앤리서치(R&R) 여론조사에선 이 총리의 거취에 대해 ‘사퇴해야 한다’는 응답이 52.8%, ‘사퇴할 사안이 아니다’는 응답이 41.6%로 나왔다. 20% 초반에 머물러 있는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을 감안하면 사퇴가 정답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당시 이강진 총리 공보수석은 “이 총리가 ‘본인의 거취 문제는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면 말씀드리겠다’고 했을 뿐 사의를 표명한 적은 없다”며 사의를 번복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당내에서는 이를 놓고 벼랑 끝에 몰린 이 총리가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는 해석도 내놓았다.
김 원내대표는 다른 방법으로 이 총리를 압박했다. 11일 부대표들에게 각각 2~3개의 상임위를 맡겨 이 총리 거취에 대한 소속 의원들의 의견을 전부 듣도록 지시한 것이다. 결과는 계파와 상관없이 ‘이 총리의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김 원내대표는 “지도부가 각 그룹의 대표자들로 구성돼 있지만 어느 그룹에도 소속되지 않은 의원들도 많다”며 “그래서 재선 이상 의원들은 내가 맡고 초선들은 원내부대표들에게 다 할당해서 모든 의원들의 의견을 듣도록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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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5일 이임사를 하고 떠나는 이해찬 전 총리.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14일 노 대통령이 귀국했을 때 분위기는 이미 ‘사퇴’로 기울어 있었다. 이 총리도 사퇴를 결심한 상태였다. 이날 정 의장이 노 대통령과의 면담 일정을 통보받은 시각은 오전 9시 50분. 노 대통령은 사실상 청와대에 도착하자마자 정 의장과의 약속부터 잡았던 셈이다. 대통령과의 면담 일정이 잡히자 정 의장은 김 원내대표를 만나 노 대통령에게 전달할 의견을 조율했다. 두 사람은 여기서 “당의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고 후임 총리 인선의 원칙까지 개진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오후 2시 40분쯤 청와대 관저에서 가진 노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정 의장은 “당의 의견과 여론을 종합할 때 이 총리의 사퇴는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개진했고 노 대통령은 “당의 뜻을 존중하겠다”며 ‘총리 사의 수용’을 결정했다. 김 원내대표의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우상호 대변인은 골프 파문의 해결에 대해 “김한길 원내대표는 당·정·청 조율, 김근태 최고위원은 이해찬 총리와의 긴밀한 논의, 정동영 의장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면담으로 역할 분담을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지난 14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조사한 정당 지지율은 열린우리당 21.7%, 한나라당 34.3%를 기록했다. 3주 전에 비해 열린우리당은 3.3%포인트 오른 반면 한나라당은 3.1%포인트 하락하며 양당 격차는 19.0%포인트에서 12.6%포인트로 좁혀졌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연구실장은 “열린우리당은 이 총리와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지지도에 타격을 받지 않았다”며 “새로운 지도부 구성 이후 당내 갈등이 잦아들고 있는 점도 지지도 격차 축소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열린우리당의 과거 지지층이었던 충청·호남권, 고학력층, 중간소득층에서 지지율이 상승했다”고 말했다.
김 원내대표는 지난 연말 유시민 의원의 입각을 놓고서도 이 총리와 한 차례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리와 유 의원은 모두 개성이 강해 여론의 반감을 사고 있으며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 지지율을 높이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김 원내대표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김 원내대표의 의견을 듣고서도 책임 총리였던 이 총리의 손을 들어줬다는 후문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여론의 흐름을 읽고 적절한 전략을 내놓은 김 원내대표의 능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그런 감각이 있었기에 두 번의 대선에서 선거전략을 맡아 승리로 이끌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내년 대선에서도 열린우리당의 주자가 누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킹메이커’는 김 원내대표의 몫이 될 것이라는 전망에는 이견이 많지 않다.
이정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