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연하남’ 이젠 잊어주세요~”
지금 들으면 오글거리는 이 대사로 10년 전 배우 박해진은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로맨티스트 ‘유정선배’가 돼 지금껏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동안 박해진은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했다. <소문난 칠공주>의 연하남으로 시작해 <내 딸 서영이>의 서영이 동생,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 바라기 절친, <나쁜 녀석들>의 소시오패스 이정문까지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이번 <치즈인더트랩>의 ‘유정 선배’를 통해 수많은 여학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뿐만 아니라 직장인 여성들의 월요병까지 치유하기도 했다. tvN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은 최근 시청률 7%를 돌파하며 승승장구 중이다. <일요신문>은 ‘유정 선배’로 열연 중인 배우 박해진을 만나봤다.
연기 10년차인 박해진은 10년 뒤 자신의 연기를 되돌아봤을 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제공=WM컴퍼니
# 치인트, 피하려고 했지만 운명이었다
지난 1일 강남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박해진은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치인트)>에서 그대로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앞으로 내린 진한 갈색머리와 아이보리색 목폴라 니트를 입은 그는 ‘만찢남’ 그 자체였다. ‘만찢남’은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의 줄임말로 드라마의 원작 캐릭터를 그대로 잘 살려냈다는 호평에서 비롯한 신조어다. 몇 년 전 웹툰 <치인트>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부터 박해진은 싱크로율 100%의 배우로 꼽혀 주인공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박해진은 유정이 될 운명이었다. 그의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력 또한 원작 <치인트>의 유정선배를 그대로 살려냈다. 뜻밖에도 본인은 정작 몇 번이나 캐스팅 제의를 고사했다.
“평소에 <치인트> 시리즈를 정독할 정도로 팬이다. <치인트>는 지인에게 추천을 받아 보게 된 웹툰으로 만화인데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정말 잘 돼 있다. 만화를 찢고 나올 자신은 없었다(웃음). 이 만화는 독자들이 읽은 후에 생각할 수 있는 여백들이 많았기 때문에 만화로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3D가 되면 독자 개개인이 상상에 맡길 수 있는 부분이 등장인물의 연기로 채워지기 때문에 부담을 느꼈다.”‘
그는 본인이 유정이라고 감정을 이입해서 한 번 더 정독했고 유정을 잘 표현하면 좋은 드라마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결국 출연을 결정했다.
# 촬영 중 에피소드
드라마 속 여자친구인 홍설과 함께할 때의 유정은 박해진의 원래 모습과 닮았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으로 과 후배인 홍설과 교제를 시작한 이후 홍설의 자취방을 방문해 앨범을 보며 친밀해지는 장면을 꼽았다.
“당시 설이와 놀면서 친근해지는 장면을 찍었는데 정말 말 그대로 촬영을 했다기보다는 (김)고은 씨와 자연스럽게 놀던 장면이 방송에 나갔다. 놀다가 책상에 머리를 부딪쳐서 NG가 났는데 그 모습이 정말 자연스러워서 드라마에 그대로 나가기도 했다. 실제로 놀라서 나온 목소리도 방송에 그대로 나갔다.”
<나쁜 녀석들>(왼쪽)과 <치즈인더트랩> 스틸컷. 사진출처=OCN·tvN
“유정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외모로 유정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전에 연기했던 <나쁜 녀석들>의 이정문 역할이 이번 캐스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는 <나쁜 녀석들>을 자신의 인생 작으로 꼽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앞머리로 한쪽 눈을 가린 채 신비로우면서도 소름끼치는 사이코패스 연기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올해 서른네 살이다. <치인트>에서 실제나이보다 열 살 남짓 어린 풋풋한 대학생을 연기했다. 실제로도 대학생으로 비춰지기에 손색이 없는 그에게 ‘동안 비결’을 물어봤다.
“대학생 캐릭터 때문에 조금 어려보이는 효과는 있겠지만 30대 중반이라 절대 20대로 보일 정도의 얼굴은 아니다. 피부 관리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관리하는 편이다. 귀가하면 바로 세안을 하고 팩 관리를 한다. 기본적으로 술, 담배를 안 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정도가 전부다.”
그는 같은 대학생을 연기하는 동료배우 서강준과 세대 차이를 느낀 적이 있다고 밝혔다. “제작발표회 때 강준 씨와 대화를 나누다가 의류 브랜드인 ‘프로월드컵’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에게 ‘형, 그게 뭐예요?’라며 해맑게 물어봐서 놀랐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세대차이인가’ 싶었다.”
그는 같이 출연한 배우들과 이번에 처음 알게 됐는데 스스럼없이 잘 지내며 촬영했다고 한다. 촬영이 끝난 지금은 <치인트>의 인기로 다들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 연하남 이미지 벗고 싶었다
박해진은 KBS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에서 ‘연하남’ 역할로 데뷔해 얼굴을 알렸다.
“연하남으로 한 방에 얼굴을 알릴 수 있었고 많이 알아봐주셔서 감사했지만 지금까지도 연하남으로만 생각하셔서 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스무 살 초반에는 서른이 되면 연하남 이미지를 벗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서른 살이 돼도 똑같더라. ‘연하남’의 풋풋한 이미지를 벗고 싶어서 운동도 많이 하고 태닝도 하고 체격도 키우고…외모를 바꾸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다.”
그는 이미지 변신뿐만 아니라 연기 변신에도 도전했다. 지난 2008년 <에덴의 동쪽>에서 정극 연기에 도전했다. 그러나 당시 연기가 지금껏 중에 가장 힘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출생 직후 다른 부모의 아기와 바뀌어서 철천지원수를 부모로 생각하고 성장하는 ‘신명훈’을 연기했다. 이후 진실을 알게 돼 충격 속에서 본래의 가족을 찾는 감정 선을 보여줬다.
“출생의 비밀을 시작으로 큰 사건들을 접하면서 급변하는 여러 감정들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배우들이 연기를 할 때 감정의 무게에 못 이겨 우울증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이해됐다.”
# 중국 진출 이후 연기에 물올라
그는 이후 중국으로 진출하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 결과적으로 중국 진출은 ‘신의 한 수’였다. 처음에는 말이 안 통하는 중국배우들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고 연기를 할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았던 점이 연기력이 좋아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화를 하기 이전에 상대 배우들의 호흡과 눈빛과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전하려는 느낌을 전달받았던 것이다. 그는 그런 과정을 통해 외국에서도 연기를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처음 중국에 진출해 촬영한 드라마에는 연기력이 탄탄한 배우들과 함께 했다. 워낙 연기력이 뛰어난 분들이라 말이 통하지 않아도 서로 교감이 돼 힘겹지 않게 중국 드라마에 데뷔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 작품에선 신인 배우들과 연기를 하게 됐다. 연기 경험이 많은 분들과 호흡을 맞출 때하고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온몸에 있는 시각, 청각, 촉각을 곤두세워 상대방의 몸짓, 손짓에 귀를 기울이고 관찰했다. 저 친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찾으며 예민하게 연기했다. 한국에 돌아오니 중국에서보다 더 편해졌고 수월해졌다. 결과적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내 스스로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됐다.”
그는 중국으로 진출하는 후배 배우들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중국이라는 큰 시장으로 가는 것은 도움이 될 만한 도전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 생각으로 가는 것보다는 좋은 작품과 캐릭터를 보고 결정해야 한다. 실제로 중국에선 수백 편씩 촬영하지만 다 방영되는 것도 아니고 계약이 돈을 쫓아서 가면 실패할 가능성이 큰 것 같다. 한국에서도 계약 문제로 말이 많은 일이 비일비재한데 말이 안 통하는 중국에서는 더 힘들 것을 감수해야 한다.”
10년차 배우인 그는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사실 그는 더 다양한 역할에 도전하기 보다는 잘할 수 있겠다고 확신이 드는 역할에 충실해왔다. 그런 그에게 10년 후를 물었다.
“연기를 시작한 것에 후회는 없다. 앞으로 다가올 10년 동안 다양한 역할을 맡으면서 역량을 펼쳐 10년 뒤 내가 내 연기를 봤을 때 지금보다 조금 더 다듬어진 배우,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고 싶다.”
그는 앞으로 휴머니즘을 소재로 하는 따뜻한 작품을 하고 싶다고 했다. 평소 <죽은 시인의 사회>나 <제8요일>과 같은 작품을 즐겨 본다는 박해진은 “주인공이고 아니고가 중요하지는 않다. <고맙습니다>의 장혁 선배님이 맡은 역할처럼 소소한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내는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소신 있는 그의 연기 행보에 응원을 보낸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
브라운관 밖에선… 신발·건담 이어 요즘엔 가구에 꽂혀 “잉여를 즐기는 덕후” 그는 <치인트> 촬영이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와 소소한 취미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배우가 되지 않았으면 실내 디자이너가 됐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다. 얼마 전 이사한 집의 인테리어도 손수 처음부터 끝까지 작업했다고 한다. 문고리 하나하나에서부터 욕실 디자인까지 그의 머리에서 나왔고 손수 작업한 것이다. 두 달간 공들였던 도면이 나온 후 인테리어를 시작해 지금은 완성단계라고 한다. 그는 설 연휴 동안 집 정리를 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집에 조명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잉여를 즐기는 덕후’라고 표현했다. 그는 하나에 꽂히면 올인하는 스타일이다. 예전에 신발을 수집했었고 건담과 같은 피규어를 모은 적도 있다. 이제는 가구에 관심이 생겼다고. 가구는 제작돼서 만들어지기까지 3~4개월이 걸려 과소비를 줄일 수 있어서 좋다고도 말했다. 최근 1920년대 디자인의 의자를 하나 구입했는데 주문하기 전에 디자인을 보고 배송돼 집에 배치됐을 때를 상상하고 기다리는 즐거움이 크다고 한다. 의자, TV장을 살 때도 원하는 사이즈, 색상을 고심해서 고른다고 말하는 그의 눈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났다. 촬영현장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꽃미모를 과시하는 그에게는 ‘잉여’, ‘덕후’의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이었다. [민] |
이상형은? 4년간 솔로…전미선 같은 분 없나요? 박해진은 화장기 없는 수수한 스타일을 좋아한다며 배우 전미선이 오랜 이상형이라고 밝혔다. 믿기 힘들지만 그는 4년 동안 여자친구가 없다고 한다. “시끄러운 일이 있었을 때부터 연애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고 그때부터 일에 집중했다”는 게 박해진의 설명이다. 그는 예전 방송 인터뷰에서도 ‘나대지 않는 여자’를 이상형으로 꼽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나댄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 있었지만 부산에서는 많이 쓰는 표현이고 집에서도 조카들이 까불 때 ‘나대지 말라’고 말한다고 해명했다. “성격이 활달한 것보다는 조용한 성격을 선호하며 화려한 스타일보다는 화장기 없는 수수한 스타일을 좋아한다. 예전에 김고은 씨나 f(x)의 크리스탈을 이상형으로 꼽기도 했었는데 그건 깨끗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진정한 이상형은 전미선 누나다. 가장 오랜 기간 이상형으로 생각해온 여배우다.” 그는 루머 아닌 루머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그가 10년 전 언론 인터뷰에서 예전에 만나던 친구와 10년 후인 2017년에도 서로 애인이 없다면 프러포즈하겠다고 말한 것이 화제가 된 것이다. “당시 만나다가 헤어진 친구가 있었는데 헤어진 후에는 정말 친구처럼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됐다. 나중에도 연락하고 지내며 서로를 축복해주는 사이가 되자는 취지에서 했던 말이 꼭 내가 로맨티스트처럼 몇 년 후에 프러포즈할 여자가 있다는 식으로 기사가 나갔더라.”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