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에 이용되거나 범죄자로 살아가거나
2008년부터 호적이 가족관계등록부로 바뀌게 돼 당시 서울의 한 시민이 시범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연합뉴스
‘가족관계등록이 돼 있지 않은 사람’은 부모가 아이를 출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라서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경우, 장기 실종 신고로 인해 주민등록이 말소된 경우 등 주민등록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2007년까지는 ‘무호적자’로 지칭됐으나, 호적부가 폐지된 2008년부터는 ‘가족관계등록이 돼 있지 않은 사람’으로 지칭된다. 편의상 ‘가족관계 미등록자’로 칭하도록 한다.
가족관계 미등록자의 경우 가족관계 등록 창설을 통해 주민등록을 할 수 있다. 법원행정처의 사법연감 자료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4년까지 7년 동안 무려 1만 8571명이 가족관계 등록 창설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는 한 해 평균 3170.5명,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한 해 평균 1963명이 가족관계 창설 등록을 했다. 이처럼 가족관계 등록 창설 의뢰 건수가 2012년 이후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가족관계 미등록자의 감소에 따른 결과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사회단체와 시민단체는 가족관계 미등록자를 3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가족관계 미등록자들은 교육·의료·사회보장 등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기본적인 혜택이나 권리를 누릴 수 없다. 이들이 국민으로서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혜택이나 권리를 받으려면 가족관계 등록 창설을 해야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선 가정법원이나 각 지방법원에 가족관계등록부 부존재증명서, 성장환경진술서 등 10여 가지의 서류를 제출해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법원에서 허가가 나기까지 최소 6개월에서 1년가량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가족관계 창설 등록 절차가 신속하게 지원될 수 있는 패스트트랙 제도가 도입돼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주장이 제기되는 근본적인 까닭은 가족관계 미등록자가 사회적 약자인 점을 악용해 노예 인부로 삼거나 범죄 행위를 강요하는 행위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관계 미등록자가 스스로 ‘가족관계 미등록자’의 신분을 악용해 범죄를 일삼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사회적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 국민으로서의 혜택 및 권리를 못 받는 가족관계 미등록자
지난 2008년부터 가족관계 등록 창설 허가를 위한 비용 지원과 법률 자문을 해주고 있는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764명이 가족관계 등록 창설을 했고, 이 가운데 상당수가 보육원이나 복지재단 등의 보호시설에 있는 고아 지적장애인이라고 한다.
대한법률구조공단 관계자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이들이 자신의 이름과 나이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면서 “의료 및 복지 혜택이 시급한 이들이 가족관계 창설 허가 재판의 지연으로 적잖은 피해를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덧붙여 “법원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 가운데 인우보증서를 작성해줄 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가족관계 미등록자 중 보호시설에 있는 지적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면서 “보육원의 어린이들이 주민등록 미등록자라서 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태어나자마자 파주보육원에 맡겨진 이기쁨 양(10)은 다섯 살이 되던 해에야 비로소 주민등록 창설 허가를 받아 유치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40대 중반이 돼서야 주민등록 창설 허가를 받은 김 아무개 씨는 그동안 국민건강보험 혜택에서 제외돼 과도한 병원비 지출을 염려해 아플 때마다 병원이 아닌 약국을 찾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병원을 자유롭게 찾을 수 있게 됐다.
박 아무개 씨(48)는 부모를 모르는 고아로 출생해 47년 동안 가족관계 미등록자 신분으로 지내왔다. 학교 한 번 다녀보지 못한 채 구두닦이로 생활하며 유년시절을 보낸 박 씨는 지난 1984년 절도죄로 구속돼 30년 동안 소년원과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지난 2014년 10월 만기 출소했으나 ‘가족관계 미등록자’라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했다. 결국 대한법률구조공단 안동출장소의 도움으로 지난해 4월 가족관계 등록 창설 허가를 받았다. 박 씨의 가족관계 창설 허가는 사건 접수 6달 만에 이뤄졌다.
50여 년 동안 가족관계 무등록자로 지내온 노숙자 아무개 씨도 지난 2014년 9월 추석을 앞두고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0살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족과 떨어져 지냈으며, 그동안 교도소를 드나들거나 노숙생활을 하며 폐지를 팔아 생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는 호적이 말소돼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만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가족관계 미등록자들 가운데에는 불법체류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무국적 이주아동도 있다. 무국적 아동이란 한국에서 출생한 일부 이주아동 가운데 부모의 체류자격 미비로 한국 주재 모국대사관에서 출생등록을 거부당했거나, 난민 신청자 등 부모의 신분 때문에 자국 대사관에 출생등록을 할 수 없어 국적이 없는 상태의 아동을 말한다. 이들의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출생신고할 경우 불법체류 사실이 들통 나 본국으로 추방될 것을 염려해 자녀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실제로 지난해 9월 무국적 이주아동인 진호 군(13)이 계모와 함께 진호 군을 키우던 아버지 김 아무개 씨가 ‘위명 여권 사용’ 혐의로 적발돼 외국인 보호소에 수감되자, 계모 오 아무개 씨를 통해 한국인에게 입양됐다. 진호 군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에요”라고 밝혀 잔잔한 슬픔을 독자들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 노동력 착취 대상이 된 가족관계 미등록자
2006년 ‘노예 할아버지’ 사건과 2011년 ‘염전 노예’ 사건은 가족관계 미등록자인 사회적 약자를 상대로 발생한 사건이다. 2006년 한 방송매체를 통해 알려진 ‘노예 할아버지’는 정확한 신원과 나이를 알 수 없는 지적장애인인 가족관계 미등록자였다. 외모를 통해 나이가 60대 중반으로 추정될 뿐이다. 1970년대 중반 산에서 길을 잃어 헤매던 중 가해자 이 아무개 씨(75)를 만나 50여 년 동안 노예처럼 굴림 당했다. 2009년 8월부터 2010년 3월까지 8개월 동안에는 난방이 전혀 되지 않고 조명조차 없는 차고에 거주하게 하면서 상한 밥과 반찬 등을 먹고 살아야 했다. 청주지법은 가해자 이 씨에 대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에 사회봉사 360시간을 선고했다. 노예 할아버지는 현재 보호시설에서 수용돼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찰이 지난 2014년 2월 전국 염전과 양식장 등 3만 8352곳을 대상으로 일제 수색을 벌인 결과 300여 명의 염부가 노동 및 임금 착취를 당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전국 단위의 일제 수색을 벌인 건 2011년 6월 신안군 증도면의 한 염전에서 가족관계 미등록자 2명이 4~5년 동안 노예 염부로 지내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른바 ‘노예 염전’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300여 명의 노예 염부들 중에서도 가족관계 미등록자가 27명이나 됐다. 가족관계 미등록자들은 자신의 이름과 나이 등을 모르는 고아와 장기 실종으로 주민등록이 말소된 이들이 대다수인 것으로 밝혀졌다.
# 범죄 악용하는 가족관계 미등록자
가족관계 미등록자들 중 교육·의료·사회보장 등의 혜택을 포기하는 대신 신원 조회가 안 된 점을 악용해 범법 행위를 일삼는 이들도 상당수라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대전서부경찰서는 2014년 4월 30일 심야시간대 화물차량에 침입해 공구를 상습적으로 훔쳐온 가족관계 미등록자 유 아무개 형제(34·35)를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2012년 6월부터 22개월 동안 1580만 원 상당의 공구를 훔쳐 인터넷 중고물품사이트에 팔아 현금화하는 등의 범행을 일삼아왔다. 유 씨 형제는 부모 생사를 모른 채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가족관계 미등록자였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유 씨 형제가 가족관계 미등록자는 추적이 어렵다는 점을 악용해 범행을 일삼아 왔음이 드러났다.
2014년 8월 장기 실종으로 주민등록이 말소된 가족관계 미등록자 오 아무개 씨(49)도 서울의 한 유명대학의 교직원을 사칭해 사기를 벌이다 제주서귀포경찰서에 붙잡혔다. 제주서귀포경찰서에 따르면 오 씨는 “학교 축제에 사용할 예정”이라고 속여 제주농가 5곳으로부터 43회에 걸쳐 3600만 원 상당의 한라봉과 천혜향, 감귤 등을 배송 받은 후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가로채 생활비를 마련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사건 담당 경찰관계자는 “20여 년 전 가출한 오 씨는 아버지의 사망신고로 주민등록이 없는 가족관계 미등록자 신분이었다”며 “경찰 추적을 따돌리기 쉽다는 점을 악용해 사기 행각을 벌여왔다”고 설명했다.
한편 지난해 5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장기매매 일당과의 채팅 내용’을 살펴보면 부산 지역의 장기매매단 가운데 ‘담금질(살해를 의미) 담당자’라고 밝힌 A 씨는 경찰 수사가 어려운 점에 대해 가족관계 미등록자 신분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대화에서 “출생 신고를 안 해서 정보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사타부언(염산으로 사체를 녹인다는 뜻), 246(장기매매 조직이 2명·4명·6명 단위로 움직인다는 뜻), 상자(장기를 의미) 등의 장기매매 전문용어를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항간에는 강력범죄자들이 후계자 육성을 위해 일부러 자녀를 출생신고하지 않거나 가족관계 미등록자를 일당으로 들인다는 괴담이 퍼지고 있기도 하다. 이 괴담에 대해 한 경찰 관계자는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일 뿐”이라며 “괴담은 괴담일 뿐, 거짓 정보에 현혹되지 않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유시혁 기자 evernur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