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팀 사령탑을 물러난 이장수 감독은 가장 깨끗해야할 스포츠계가 요즘 이상하다며 진한 회의감을 드러냈다. 새로운 도전이 두렵지 않다는 그의 말에서 힘든 싸움을 피하지 않는 용장의 모습이 겹쳐진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전남 감독에서 해임된(그는 ‘목이 잘렸다’고 표현했다) 이장수 감독과의 만남은 2주 만이었다. 광양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 집으로 돌아온 뒤 2주 동안 낮엔 거의 두문불출이었단다. 사람을 만나도 저녁 시간을 이용했다. 줄곧 한 길만 달려온 축구 인생에 자진 사퇴도 아니고 해임된 모양새가 외출까지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해임된 이후 구단에서 황당하기 짝이 없는 해임 사유를 밝히는 바람에 이 감독은 적잖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 부분과 관련해선 어떤 형태로든 명예회복을 하겠다고 한다.
이 감독의 축구인생을 주제로만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하고 빵집 데이트를 시작했다.
전남 인연일까 악연일까
이장수 감독은 강한 외모와는 달리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다. 전남에 머물 때도 선수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눠 말수 적기로 유명한 김남일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선수단을 몰아칠 때는 사정없이 채찍질하다가도 운동장 밖에선 감독과 선수라기보단 이웃집 아저씨처럼 이런저런 농담으로 선수들의 굳은 마음을 풀어주려 애썼고 이런 부분 때문에 선수들과 보이지 않는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2003년 중국에서 돌아온 뒤 재충전을 위해 한사코 고사했던 전남팀 감독이었지만 전남 감독의 타이틀을 달고선 중국에서의 열정 못지않게 선수단을 위해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전기 리그 성적이 비록 하위권에 맴돌았어도 걱정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선수들을 제대로 파악하는데 전반기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년은 성적에 관계없이 여유롭게 지켜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후기리그 때 열악한 상황에서도 선수들이 너무 잘 해줬어요. 제가 한 건 별로 없어요. 진심입니다. 선수들과 코치들이 계산 없이 열심히 해준 덕분이죠. 비록 전남을 떠나긴 했지만 선수단에 대해서만큼은 좋은 추억과 인상을 갖고 있어요.”
12월5일 수원과의 플레이오프를 치른 바로 다음날 한 스포츠 신문에 전남 구단에서 이장수 감독을 퇴출시킨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이틀 후 이 감독은 구단으로부터 정식 해임 통보를 받게 된다. 해임 사유는 ‘감독이 언론과 인터뷰할 때 구단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부분과 ‘감독이 언론 플레이를 통해 구단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내용이었다. 이 감독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해임 사유였지만 구단과 부딪히는 게 의미도 없고 솔직히 지치기도 했다. 그래서 순순히 전남을 떠나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오늘 잘렸다고 다음날 바로 짐 싸서 올 수는 없는 거잖아요. 선수들과 마지막 인사도 해야 하고 그동안 여러 면에서 도움을 준 지역 인사들도 찾아 봬야 하고… 그런데 오래 머물 수가 없었어요. 내가 광양에 있다는 것 자체가 여러 사람들에게 짐이 될 수 있겠더라구요. 코치들도 불편해 할 것 같고. 짐을 채 꾸리지도 못하고 광양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들었다고 한다. 구단과의 오랜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홀가분함 보다는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게 참으로 마음 아팠단다. 감독으로 있을 때는 집보다 더 편한 곳이 광양이었지만 타이틀을 뗀 다음엔 자꾸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마냥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뒤통수 맞은 ‘축구 인생’
그런데 광양을 떠나는 것으로 전남과의 인연을 ‘쫑’친 게 아니었다. 구단에선 끊임없이 이 감독을 용병 비리와 관련 있는 걸로 몰아세우며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며 흠집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감독은 그 부분에 대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식의 목숨을 담보로 나의 결백을 증명하겠다’며 피를 토하는 심정이 돼 갔다.
“이 자리에서 그 얘기는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요. (한참 생각에 잠기다) 감독으로 부임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서 선수를 사들이며 돈 장난을 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만약 그랬다면 중국에서 제가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전 지금까지 정도를 벗어난 짓은 해본 적이 없어요. 제 결백을 알리기 위해 제 속을 까 보일 수도 없고 시청 앞에서 분신자살로 증명해 보일 수도 없고, 한강 다리에서 투신하는 걸로 결백을 알릴 수도 없는 거잖아요. 증거도 대지 못하면서 단지 추측으로만 한 사람의 축구인생을 이렇게 망쳐놓는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요.”
전남 구단과 관련된 얘기를 질문하지 않기로 하고 시작한 인터뷰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흘러가고 말았다. 수습이 필요했다. “중국에서도 힘든 일이 많았잖아요. 그때가 더 어렵지 않았나요?”
▲ 이장수 감독이 전남팀을 지휘하던 모습. 그는 유머감각으로 선수들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고. | ||
“중국에선 힘든 일이 더 많았죠. 그래도 한국에선 말이 통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으니까 그나마 나았어요.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전 쉽게 사는 팔자가 아닌가 봐요.”
중국 휩쓴 첫 한류열풍
이 감독은 98년 6월 한국을 떠나 충칭의 사령탑으로서 첫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갑급 A조 리판을 2001년까지 4시즌 동안 이끌며 2000년 FA컵 우승을 차지하는 등 ‘충칭의 별’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중국 프로 축구에 최초로 ‘한류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이었던 그는 2000년 중국축구협회 선정 ‘올해의 감독’으로 뽑힌 것은 물론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가장 오랫동안 감독의 자리에 앉았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감독은 당시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런 내용으로 인터뷰를 했었다. ‘난 항상 절벽에 서서 일을 했다. 그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캄캄한 깊은 산속에 불빛조차 없는 어두운 곳에서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막막함, 참담함의 연속이었다. 의논할 사람도 없었고 조언조차 구할 수 없는 곳에서 그래도 잘 버텨낸 걸 보면 난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외국에서 매일같이 커다란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기분으로 산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말로 다 표현 못할, 거짓말 같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일주일에 서너 번은 충칭팀과 나와 관련된 기사로 신문이 도배를 할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스타플레이어라고 해도 불성실하면 가차없이 잘랐고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 새벽까지 지키고 있다가 벌금을 내리기도 했죠. 가짜로 경기하는 선수를 잡아다가 자르기도 했고, 그 얘기를 다하려면 24시간도 모자랄 거예요. 그런 험난한 우여곡절을 겪고 나니까 잡히지 않던 선수들이 내 손으로 들어오더라구요. 그러다 막판에 ‘대형사고’가 일어나고 말았죠.”
언론사와 끝내기 재판
2001년 3월 스포츠 전문지 <난방티위>에서 이 감독이 드래프트에서 특정 선수를 뽑지 않은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내용의 기사가 터진 것이다. 세 차례나 열린 재판은 2년 동안 진행됐다. 아마도 중국 생활 6년간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시기였을 것이다. 결국 이 감독의 승소로 재판은 끝났고 신문사측에선 이 감독에게 16만위안(한화 약 2천5백만원)의 배상금을 지급해야만 했다.
“그런 일들이 계기가 돼서 결국 충칭을 떠나게 됐어요. 그런데 팬들이 숙소까지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가지 말라고 만류를 하더라구요. 팬들도 울고 나도 울고 한동안 울음바다가 됐죠. 충칭에서의 마지막 경기 때는 운동장에 3만 명이 꽉 들어찼어요. 경기가 끝났는데도 관중들이 나갈 생각을 안하더라구요. 충칭은 영원히 잊지 못할 곳이에요. 칭다오로 떠나갈 때도 공항에 수백 명의 팬들이 나와 아쉬움을 전했으니까요.”
이 감독은 재판의 배상금으로 받은 16만위안을 충칭시에 모두 내놓았다. 6만위안은 축구 발전을 위해, 나머지 10만위안은 학교가 없어 제대로 공부를 못하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학교 설립에 보탰다.
“이런 얘기 처음하는 건데, 그때 내 도움을 받은 학교에서 학교 이름을 ‘이장수 학교’로 지었다고 해요. 1년에 한 번씩은 방문해서 학교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에요. 이번에 학교 교장선생님과 한 약속도 있고 해서 1월에 중국으로 출국할 예정입니다. 충칭에서 받은 사랑을 어떻게 해서든 보답할 생각이에요.”
2002년 칭다오로 자리를 옮긴 이 감독은 그곳에서도 ‘이장수 열풍’을 이어갔다. 부임 첫 해 FA컵 우승을 차지했고 15개팀 중 꼴찌에 머물렀던 칭다오를 정규리그 8위까지 끌어올렸다.
그런데 이 감독은 중국에서 감독 생활하며 구단과 1년마다 계약을 새로 했다고 한다. 구단에선 2~3년을 제안했지만 이 감독이 고사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모 아니면 도였죠. 성적이 좋으면 더 좋은 조건을 계약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라면 한순간에 잘릴 수 있는 거잖아요. 전 잘리는 걸 두려워해선 프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1년 후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면 시즌 동안 내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성적을 내야 했죠. 스릴도 있었고 끊임없는 자극제가 됐죠.”
그래도 난 행복한 사람
감독에서 물러났지만 이 감독이 다시 현장에 복귀하는 건 시간 문제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특히 중국에서는 지금까지도 ‘러브콜’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 감독은 일단 쉬고 싶다고 한다.
“일단 쉬면서 내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싶어요. 사실 이번에 실망이 컸어요. 스포츠라는 게 정직하고 깨끗해야 하는데 너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요. 많은 충격을 받기도 했고. 아직 정확한 답은 안 나왔지만 만약 (지도자의 길이) 아니다 싶으면 모든 걸 접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전 얼마든지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도전을 할 자신 있거든요. 지도자만이 살아갈 길은 아니잖아요.”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감독 말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고? 다시 물었다. 잘못 들은 것 같아서. 이 감독은 똑같이 얘기했다. 축구 감독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고 되풀이했다. 그렇다고 당장 인생의 궤도 수정을 가한다는 내용은 아니었다. 아직도 이 감독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카드’가 있었다. 선택 당하기보단 선택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에 ‘그래도’ 행복해 보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 한 스포츠 신문에 이장수 감독이 중국대표팀 감독 물망에 올랐다는 내용이 소개됐다. 관련 소식이 궁금해서 이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진위 여부를 묻자, “아직까지 구체적인 프러포즈는 없었지만 그런 말들이 오고 갔다고는 들었다”면서 “만약 (중국대표팀 감독) 제의가 온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털어 놓았다.
순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이장수 감독의 축구 인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