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자리 뜨자 곰·여우·토끼 우르르~
2월 18일 현재 남양주을의 예비후보 수는 18명으로 전국 1위다. 사진은 예비후보들 사무실이 밀집돼 있는 남양주시 진접읍 해밀예당1로. 임준선 기자
“안철수는 국민과 함께, 표철수는 남양주와 함께.”
“남양주에서 대한민국까지 한 번에 통한다.”
남양주시 진접읍 센터프라자 건물엔 대형 현수막들이 건물 외벽을 감싸고 있었다. 하나는 국민의당 예비후보 표철수 경기도 전 정무부지사, 다른 하나는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 김한정 전 청와대 부속실장의 현수막이다. 바로 옆 건물에는 또 다른 ‘철수’가 현수막을 내걸었다. 더민주 예비후보 박철수 변호사는 “박기춘 의원 보좌관, 철도는 철수가”라는 메시지를 현수막에 담았다. 현수막들도 경쟁을 하듯, 경계선들이 서로 바짝 붙어 있었다. 후끈 달아오른 선거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너무 많으니까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다.”
이날 오전 10시경 만난 김한정 후보의 말이다. 김 후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오랫동안 보좌한 동교동계의 막내다. 그는 “나온 후보들이 많지만 진짜 당선되려고 하는 분은 사실 몇 사람 없다”며 “야권 후보들조차 ‘툭’하고 떨어진 분들이 많고 은근슬쩍 이름을 알려보겠다는 사람도 있다”고 밝혔다. 김 후보 측근 역시 “총선을 사업 홍보용으로 삼는 사람까지 있다고 들었다. 심지어 어떤 후보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다”고 보탰다. 남양주을에서 더민주 간판을 내건 예비후보들은 5명. 국민의당 후보도 5명, 새누리당 후보는 8명이다.
남양주을에 이렇게 많은 후보가 뛰어든 이유는 최근 ‘지역 맹주’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장본인은 박기춘 더민주 의원. 박 의원은 이곳에서 내리 3선을 했다. 과거에는 박 의원의 지지세가 워낙 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다른 경쟁자들이 쉽사리 도전할 수 없었다. 그런 박 의원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되면서 불출마 선언을 하자, 이곳은 순식간에 ‘무주공산’이 돼버렸다.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것. 남양주에서 15년을 거주한 최 아무개 씨(29)는 “맹주가 사라지니까 너도 나도 뛰어들고 있다. 이번 선거가 재밌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사정은 바로 옆 지역구인 남양주갑도 비슷하다. 이곳의 예비후보 등록자수도 무려 10명이다. ‘3선’ 최재성 더민주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했기 때문. ‘거물급’ 의원 두 사람이 없어지자 봇물 터지듯이 후보들이 너도나도 선거에 뛰어든 셈이다.
“박 의원이 계셨다면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을 거다.”
박철수 후보의 말이다. 박기춘 의원의 특별보좌관 출신인 박 후보는 “박 의원은 옥중에서 치열한 반성을 하고 있고 저도 반성 중이다”며 “하지만 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박 의원이 마무리하지 못한 지역 숙원 사업을 완성하는 것이 저의 출마 목적”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자칫 박 의원을 내세우는 선거 전략이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지만 박 후보는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는 “박 의원의 공이 묻혀선 안 된다. 교통 전문가인 제 진심을 유권자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표철수 후보 진영의 입장은 달랐다. 표 후보의 측근은 “시계 받고 돈 받고 전과 있는 사람 공천해주고…”라며 “박 의원 때문에 남양주을이 부패의 상징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국민의당은 표 후보를 지원사격하고 있다. 18일 오후 2시경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표 후보의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안 대표는 표 후보에게 나침반을 선물하며 “표철수 예비후보는 존경하는 선배다. 언론인으로서, 경영인으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소개했다.
세 야당 후보의 선거사무소에서 약 100m 떨어진 길 건너편, 두 명의 새누리당 예비후보들은 같은 건물에 선거 캠프를 차렸다. 김성태 경기도당 부위원장과 안만규 남양주 지속가능발전협의회 상임의장이 그 주인공. 두 후보의 선거사무소 앞에는 이번 총선에 함께 출사표를 던진 이인규 새누리당 전 경기도의원의 사무소가 있었다.
김성태 후보의 측근은 “박기춘 의원의 지지세가 워낙 셌지만 여당이 계속 외부 사람을 전략 공천을 해서 선거에서 진 탓도 크다”며 “다행히 이번엔 우리당 후보들이 전부 이 지역 출신이다”고 설명했다. 안 후보의 측근도 “박 의원이 아무리 옥중이라고 해도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고 덧붙였다.
그 앞 장현다리를 건너면 이의용 전 경기도의원의 선거 사무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 후보는 새누리당 남양주을 당협위원장이었지만 공천 신청과 동시에 직을 사퇴했다. 앞서의 세 후보를 포함해 여야를 망라해 후보 7명의 선거 사무소가 몰려있는 셈. 이 후보는 “나조차도 박 의원의 입김 때문에 힘을 못 썼다. 그분이 안 나오니까 너도나도 할 수 있다고 보는 거다”며 “우리 당내에서도 사회 경력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 나왔다. 특히 어떤 후보는 참…”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남양주병’으로 분구 가능성이 높은 도농역 주변 전경. 임준선 기자
오후 1시경, 취재팀은 ‘남양주병’으로 분구 가능성이 높은 도농역 인근을 찾았다. 지하철 경의·중앙선이 지나가는 이곳은 주상복합아파트를 중심으로 6~7개의 선거사무소가 있다. 신설될 남양주병이 도농동을 포함할 것이라는 후보들의 기대 때문이다. 각 사무소의 분위기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최민희 더민주 의원(비례)도 이곳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최 의원의 사무소에선 7~8명의 보좌진들이 바쁘게 자료를 정리를 하고 있었다.
최 의원의 측근은 “보통 원외위원장이 수십 년 관리했던 지역이면 그 사람과 경쟁해야 하는데 신설될 지역구는 그럴 필요가 없다”며 “최재성 의원과 박기춘 의원이 지역구를 추천해서 의원님이 이쪽으로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새누리당 예비후보인 민정심 전 당 부대변인 역시 “남양주병을 생각하고 있다. 사실 후보자가 많다고 하지만 선거구가 획정되지 않아서 그런 면이 크다. 답답하다”며 “뚜렷하게 인지도가 높은 후보가 없는 상황이다. 이름도 못 들어보거나 얼굴 한 번 못 본 사람도 많다”고 전했다.
민 후보 선거사무소 양 옆으로 새누리당 예비후보 주광덕 전 의원와 국민의당 예비후보 이진호 변호사의 사무소가 있었다. 이진호 후보는 “오히려 후보가 난립하는 분위기가 국민에게 더 좋다고 본다”며 “2012년 선거 당시 민주당에 박 의원과 예비후보 한 사람이 경선을 했는데 그 한 사람이 저였다.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좀 더 반영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길에서 만난 시민 김 아무개 씨(56·여)는 “후보가 많다면 그만큼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후보자 검증에 더 유리하게 작용할 것 같다”며 “아무래도 지역 일꾼에 마음이 더 가는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과연 남양주을의 새로운 맹주는 누가 될까. 이번 총선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