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2월12일 저녁 7시 인천공항이었다. 토요일 저녁이었는데도 공항은 비교적 한산했다. 그래서인지 시커먼(?) 무리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불사조’ 광주 상무가 중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나는 날이라 검은색 점퍼를 걸친 키 큰 장병들이 단박에 눈에 띄었던 것. ‘본프레레호의 황태자’로 자리를 굳힌 이동국과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으며 오늘의 주인공을 찾았다. 한쪽에서 다소 쑥스러운 표정을 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각진’ 정경호가 나타났다.
현재 신병교육기간이라 선배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그는 대표팀에서보다 훨씬 긴장된 표정으로 각별히 언행에 조심하며 사진 촬영에 응했다. 그나마 인터뷰는 쿠웨이트전이 끝난 직후 이뤄져 촬영 때보다는 좀 더 편한 분위기에서 정경호의 속내를 들을 수 있었다.
정경호는 쿠웨이트전에 후반 20분을 남겨 놓고 이천수와 교체 투입됐다. 경기 전까지만 해도 누가 주전 자리에 뽑힐지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터라 쿠웨이트전의 선발 명단은 선수들의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공격진에는 이동국을 중심으로 설기현과 이천수가 선발되었다. 정경호는 ‘혹시’하는 심정으로 기다렸다가 ‘역시나’하는 기분으로 쿠웨이트전을 맞이했다고 말한다.
▲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성적이 우수했던 ‘본고사’와는 달리 ‘예비고사’ 성격의 이집트와의 평가전에서 대표팀이 졸전을 면치 못했던 부분에 대해 정경호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운동량이 적은 상태에서 갑자기 경기를 치르니까 적응이 안됐던 것 같아요. 특히 경기장의 잔디가 많이 얼어 있어 부상당할 걱정에 선수들이 베스트를 하지 않은 이유도 컸구요. 매스컴에선 엉망, 졸전이라며 대표팀을 위기 상황으로 몰고 갔지만 선수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특히 몇몇 선수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투혼을 불살라봐야 해외파가 들어오면 탈락할 거란 생각에 의욕이 저하된 플레이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해외파, 해외파 하는데 해외파는 뭔가 다르다는 인식 자체가 국내파들을 더욱 힘들게 했어요. 그런 선입견을 뛰어넘으려고 무지 애를 쓰다가도 정작 해외파를 기용해서 성적이 좋아지면 국내파만 바보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쿠웨이트전 때 보니까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밥 먹듯이 경기를 펼친 선수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더라구요. 실력도 실력이지만 경기장에서의 여유와 자신감이 정말 부러웠어요.”
정경호는 미국전지훈련에 합류하기 전 4주 동안 기초군사훈련을 받느라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긴장과 부담감을 가득 안고 시작한 미국 전훈에서 정경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위기 의식으로 인해 잠시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고 한다.
“이번이 태극마크를 다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쿠엘류 감독님이 계실 때 처음으로 대표팀에 발탁된 이후 여러 차례 좋은 기회가 많았지만 제가 부족해서 그 기회를 잡지 못했거든요. 아시안컵이나 올림픽대표팀의 와일드카드 등 정경호란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어요. 자연스레 자신감 상실로 이어졌고 무기력한 플레이로 일관했죠. 그런 상황에서 미국 전훈은 저에게 또 다른 기회였어요. 이번만큼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발악을 한 덕분인지 성적도 꽤 괜찮았죠.”
정경호는 LA전지훈련에서 펼쳐진 세 차례의 평가전에서 대표팀이 기록한 세 골 중 두 골을 뽑아내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폭발적인 스피드와 가공할 만한 측면 돌파, 과감한 중거리슛에다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플레이는 본프레레 감독은 물론 축구팬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미국 전훈에서 본프레레 감독에게 ‘콱’ 찍힌 정경호는 쿠웨이트전을 앞두고 피 말리는 서바이벌 경쟁을 벌이며 마지막 18명의 엔트리에 진입하기 위해 또 다시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처음 26명에서 5명이 탈락되고 거기서 3명이 또 떨어져 나가야 엔트리 진입이 가능해지자 막판엔 선수들 분위기가 아주 ‘쏴’ 했어요. 해외파 이외엔 누구 하나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밤에 잠이 오지 않더라구요. 특히 감독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더더욱 힘들었어요. 감독님은 선수들이 튀는 걸 싫어하시거든요. 자신의 의도대로 무조건 따라주는 선수를 좋아해요. 3-4-3포메이션에선 사이드에서 뛰는 선수들에게는 측면돌파만 원하세요. 즉 사이드에 있는 선수가 중앙으로 뛰어 들거나 포지션을 오락가락하면 아주 싫어하세요. 그래서 연습 때는 지겹도록 측면만 뛰어다녔어요. 감독님 눈에 들려고.”
지난 4일 이집트와의 평가전에서 정경호가 오프사이드인 줄 모르고 골을 성공시킨 후 ‘가자 2006 독일월드컵’이라고 쓰인 속옷 세리머니를 펼친 해프닝은 대표팀에서조차 오랫동안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그 상황에 대해 다시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하자 “아주 민망했다”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한다.
“오프사이드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조)재진이가 먼저 들어갔고 재진이의 슈팅이 골키퍼를 맞고 나온 걸 골로 성공시킨 거라 조금치의 의심도 없었죠. 미리 준비한 속옷 세리머니를 하며 카메라 기자들 앞으로 달려가는데 왠지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그제야 깃발을 들고 있는 선심을 쳐다봤어요. 경기 끝난 뒤 선수들이 다들 한 마디씩 하더군요. 자기들도 모르게 언제 그런 거(속옷 세리머니) 준비했냐면서. 하하”
▲ 이영미기자와 정경호 선수(왼쪽), 지난 4일 이집트와의 평가전에서 정경호가 오프사이드인 줄 모르고 골을 넣은 후 속옷 세리머니를 했다. 속옷엔 ‘가자 2006 독일 월드컵’이라고 씌어 있다. | ||
“이걸 꼭 말씀 드려야 하나요? 사전 정보에 의하면 국방부 장관님과 부대장님이 경기장에 오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골을 넣고 곧바로 본부석으로 달려가 ‘충성’하며 경례를 할 예정이었죠. 그랬다면 아주 좋아하셨을 텐데…. 쩝”
얼마 전 언론을 통해 공개한, 교제 경력 5년이란 만만치 않은 프로필을 갖고 있는 여자친구와의 관계에 대해서 물었다. 대학 때 처음 만났다는 그녀는 정경호가 잘될 때보다 힘들 때 옆에서 가장 큰 힘과 용기를 준 존재라고 한다. 이름을 밝혀달라고 하자 손사래를 친다. 대신 자기가 현재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결혼한다면 반드시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말로 더 이상의 질문을 사양한다. 정경호가 사랑하는 그녀는 현재 울산에서 학원강사로 일하는 중이다.
이동국? 엄청난 스타 딸랑딸랑
인터뷰 내내 반듯한 이미지를 고수한 정경호를 조금은 흔들 수 있는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바로 ‘이니셜 토크’다.
―대표팀에서 가장 잘 놀 것 같은 선수는?
▲K. 워낙 성격이 밝고 주위 사람들을 재밌게 해주는데 탁월한 소질이 있다.
―평소 생활은 엉망인데 게임만큼은 잘 풀어가는 선수는?
▲K. 위의 K와는 다른 선수다. 평소엔 안 그러는데 무슨 게임만 하면 죽기살기로 덤빈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기자는 게임을 축구로 생각했고, 정경호는 게임을 정말 ‘게임’으로 해석해 대답했다. 아마도 골키퍼 김영광이 아닐까 ^^).
―가장 닮고 싶은 선수가 있다면?
▲Y. 한결 같은 선배다. 선후배, 동료를 챙기는 마음 씀씀이가 남다르다. 정말 존경한다(유상철이라고 말해도 누가 화내지 않을 텐데).
―군대 가서 정신 차려야 할 선수는?
▲L이다. 워낙 가진 게 많은 선수다. 좀 더 남을 배려하라는 의미에서 군대 같은 단체 생활을 해본다면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자기랑 포지션 경쟁 벌이는 그 ‘L’을 말하는 게 아닐까 ^^;).
―본프레레 감독을 다섯 글자로 표현 한다면?
▲한다면 한다.
―병장 이동국을 다섯 글자로 표현 한다면?
▲엄청난 스타(딸랑딸랑 소리가 마구 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