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속팀 요코하마의 A3대회 참가로 제주를 찾은 안정환. 결혼생활의 행복을 느끼기 때문인지 부상중임에도 그에겐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졌다. | ||
지난 17일, ‘A3 닛산 챔피언스컵 2005’가 열리고 있는 제주에서 안정환을 만났다. 기자 앞에서 나름대로 ‘포장’을 걷어낸 채 진솔하고 재미난 스토리들을 술술 풀어내는 말솜씨에 ‘저 사람이 축구선수 안정환 맞나?’ 싶을 정도였다. 다양한 사건과 사고로 축구인생의 안팎을 넘나든 스타플레이어의 뒷모습을 알아본다.
부상
안정환은 그동안 부상과 인연이 없었다. 경미한 통증으로 하루 이틀 운동을 건너 뛸 때는 있었지만 깁스를 하고 몸져 누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지난 11월17일 월드컵 2차예선 몰디브전에서 골절상을 당한 후 처음으로 재활 훈련이라는 걸 하고 있다. 오만가지 생각이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그를 힘들게 했을 것 같았다.
“오히려 부상 이후에 쉴 수 있어서 좋았어요. 작년에 너무 많은 시합을 뛰면서 몸을 혹사시켰거든요. 자연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았죠. 대표팀에 합류할 때는 항상 지친 상태로 들어갔어요. 소속팀 일정도 빡빡했으니까. 그러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대표팀에 들어가면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생기더라구요. 힘들었죠.”
당시 이탈리아 진출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계약서에 사인만 남겨 놓은 중요한 시기에 부상으로 좌절된 아픔과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하는 동안 후배들이 급성장하며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부분들은 아무리 내색 안하려고 해도 조금 ‘껄쩍지근’했을 것이다.
“전혀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유럽 진출 문제는 또 기회가 있을 겁니다. 아쉽더라도 그렇게 위안을 삼을 수밖에요. 대표팀 주전 경쟁은 당연한 거예요. 경쟁 구도로 가야만 해요. 후배들과의 경쟁을 신경 쓰기보단 내가 잘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월드컵 때 경기하는 건데요 뭘.”
경쟁
그래서 이동국의 부활에 대해서 물었다. 둘의 포지션이 중복될 경우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한 안정환이 몰디브전 때처럼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옮겨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관없어요. 본프레레 감독님이 몰디브전을 앞두고 동국이를 센터에 세울 테니 저더러 오른쪽 자리를 맡으라고 주문하시더라구요. 난 어느 자리든 개의치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다 해봤으니까. 자신있으니까. 지금도 그래요.”
본프레레 감독은 몰디브전 경기 당일 아침에 안정환을 따로 불러 “너도 내가 필요로 하는 좋은 선수지만 이동국도 좋은 선수다. 이동국을 센터에 세우고 싶은데 자리를 양보할 수 있겠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선배 입장에선 다소 불편할 수 있는 감독의 제안을 안정환은 별다른 부담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몰디브전에서 부상을 당한 것이다.
조심스럽게 속내를 밝히는 안정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전에 이동국 선수 얘기로는 안정환 선수와 함께 설 경우 조금 부담스럽다고 하던데요?”
“그럴 수 있죠. 내가 선배니까. 그건 동국이가 이겨낼 문제 아닌가? 난 동국이와 경쟁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전에 친하게 지냈던 관계라 동국이의 재기를 보면서 내심 흐뭇하고 그래요. (동국이가) 지금 이 고비 넘기고 한 단계 더 올라서면 안전하게 갈 거예요. (고)종수도 동국이처럼 좋아져야 하는데….”
욕심
대표팀 경기에서 안정환이 보여주는 플레이를 놓고 가장 자주 지적되는 부분이 골 욕심이 많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안정환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지적이었다. 안정환이 유독 열변을 토했던 대목이다.
“난 그런 기사나 비판들을 볼 때마다 막 화가 나요. 이건 축구 상식이 떨어진 내용이죠. 축구선수가 골 욕심이 없으면 뭘 하라는 거죠? 이탈리아에 있을 땐 감독이 왜 골 욕심이 없냐면서 맨날 다그쳤어요. 결국 자기가 주문한 대로 패스도 안하고 골 욕심 내는 애만 게임 뛰게 했죠. 그 감독 얘기론 확률적으로 골 욕심을 많이 내야 골이 터진다는 주장이었어요. 외국에선 기자가 선수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골 욕심이 많냐’는 질문을 하지도 못해요. 바보 같은 질문이니까.”
매스컴과 네티즌들의 다른 비판은 겸허히 받아들이겠지만 골 욕심 운운하는 부분만큼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다. 높은 목소리 톤을 봐선 그런 비난들로 인해 적잖이 마음 고생을 한 모양이다.
현재 이상 열기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박주영 열풍에 대해 대선배 안정환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솔직히 난 박주영이 하는 플레이를 관심있게 지켜보진 못했어요. 대표팀에 합류한 적이 있었지만 주전들 서브만 해주는 선수였으니까. 물론 잘하는 선수죠. 대성할 재목이고. 그런데 문제는 언론이 박주영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만약 내가 감독인데 언론에서 박주영을 뽑으라고 닦달을 하면 그 선수를 뽑겠어요? 절대 안 뽑아요. 선수 선발은 감독 고유의 권한인데 그걸 언론에 의해 침해당한다고 생각하면서까지 그 선수를 뽑겠냐구요. 박주영이 대표팀에서 뛰는 걸 보고 싶다면 절대 띄우지 마세요. 띄울수록 선수를 죽이는 일이니까.” 안정환은 일본의 ‘괴물’ 히라야마를 예로 들었다. 히라야마는 ‘일본판 박주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예비 특급 스타로 축구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모으고 있는 스트라이커다. 그러나 일본의 어느 신문에서도 히라야마를 성인대표팀에 넣어야 한다는 기사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네덜란드 사람들 성향이 있어요. 고집스런 뭔가가 있거든요. 예전 히딩크 감독님이 있을 때 최성국과 정조국을 뽑아야 한다고 매스컴에서 난리를 쳤잖아요. 결국 히딩크 감독님이 뽑긴 했지만 그 선수들을 주전으로 쓰지 않았어요. 연습 상대만 시켰지. 그 두 선수 지금 대표팀에 남아 있나요? 다 사라졌잖아. 이 꼴 나요. 박주영도.”
회환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냐고 물었다. 안정환은 주저하지 않고 2002년 9월이라고 대답했다.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중에 알고보니 안정환은 2002년 월드컵 이후 이탈리아 페루자와 부산 아이콘스가 안정환을 놓고 벌인 소유권 분쟁을 떠올린 것이다. 당시만 해도 안정환은 ‘한국에서 뛰는 일이 있어도 절대 페루자엔 돌아가지 않겠다’고 ‘쎄게’ 버텼다. 결국 일본의 PM매니지먼트사에서 이 분쟁을 해결해준 뒤 안정환을 시미즈 S펄스로 이적시켰다.
“현산(부산 아이콘스의 모기업 현대산업개발)과 페루자가 싸울 때 페루자로 안 간 게 지금 가장 후회돼요. 돈으로 해결하고라도 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거든요. 만약 그때 페루자로 돌아갔더라면 지금쯤 다른 리그에서 뛰고 있었을 겁니다. 돈 문제로 이리저리 얽히고설키다가 결국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죠. 어리석었죠. 세상 물정도 몰랐고.”
꿈1
안정환은 요코하마와 재계약을 미루다 6개월 단기계약을 맺었다. 물론 안정환이 요구해서 그런 계약이 성사된 것이다. 이유가 궁금했다.
“아시면서 물어보시네. 유럽 진출 때문이죠. 앞으로 내가 축구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야 5~6년 정도 될 거예요. 그 안에 많은 리그를 접해 보고 싶어요. 안정환 프로필에 여러 나라의 클럽 이름이 들어가면 정말 기분 좋을 것 같아요. 내 딸 리원이한테도 아빠가 좋은 나라에서 축구를 잘했구나 하는 걸 자랑도 하고 싶고. 평생 남는 거니까. 꼭 다시 나가고 싶어요.”
해외 진출 때마다 이적료 문제가 발목을 잡았던 이전 상황과 지금은 완전 다른 양상이라고 한다. 돈 문제는 잘 해결됐고 부상도 회복중이고 이젠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안정환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든다.
“운이 좋아야 돼요. 모든 게 다 해결됐다고 믿고 있다가 어떤 돌발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니까요. 이탈리아도 좋지만 될 수 있으면 잉글랜드나 스페인 쪽이었음 더 좋겠어요.”
유럽 진출 문제가 나오니까 옆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안정환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주)티엔터테인먼트의 양명규 이사가 조만간 이탈리아에서 좋은 조건으로 제안이 들어올 것이라고 운을 띄운 다음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는다.
꿈2
안정환은 이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은퇴 후에 선교사로 활동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낸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 얘기를 하면서 안정환은 다시 못을 박는다. “내가 만약 프로팀 감독을 하는 일 등은 절대 없을 겁니다.”
사생활
축구선수이면서 개인사로 인해 자주 언론에 오르내렸던 안정환은 모친 문제를 포함해서 생부가 누구인지를 놓고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은 적이 있었다. 생부 문제에 대해선 이전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내가 장씨인지, 김씨인지 그게 뭐가 중요하냐. 죽을 때까지 안정환으로 살 건데 왜 지금 친부의 성이 중요하냐”며 울분을 토한 적이 있었다. 짓궂다고 생각하면서 어렵게 그 얘길 다시 꺼냈다.
“이젠 다 옛날 얘긴데요 뭘.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물론 힘든 적도 있었죠. 세상이 싫다는 푸념도 해봤고. 다 팔자라고 생각해요.”
안정환은 결혼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고 감사하다고 표현했다. 만약 지금까지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았더라면 많은 유혹에 빠져 지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프로 데뷔 시절 축구 실력보다 외모를 먼저 끄집어내는 기자들에게 반감도 많았다는 안정환은 “그런데 요즘엔 외모 얘기 안 꺼내던데요. 옛날엔 그렇게 듣기 싫은 말이었는데”라면서 외모보다 축구선수로 인정받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청년시절의 안정환을 그려냈다.
일본 생활을 시작하며 선수들에게 왕따당하지 않으려고 물통도 나르고 동료들에게 밥과 술도 쏘면서 말도 안 되는 일본어로 친근함을 과시했던 일화와 요코하마 시절 국가대표팀에서 ‘맞장’ 떴던 선수들이 먼저 다가와 친해지고 싶다고 접근했던 얘기들은 안정환의 또 다른 면을 느끼게 해준다.
축구선수 안정환에게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선수 이전에 남편과 아빠로 충만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탓이 클 것이다. 여유와 편안함, ‘카리스마 안’의 새로운 이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