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노트’를 ‘쉰들러 리스트’로…이한구 고민 되겠네
김무성 대표와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
숫자는 차이가 있었지만 리스트 내용은 대부분 유사했다. 비박계 의원이 주로 물갈이 대상으로 거론됐고, 친박계에선 몇몇 중진 의원이 포함됐다. 이는 살생부 작성 배후가 친박계가 아니냐는 의혹을 뒷받침했다. 비박계 의원을 대거 교체하기 위한 명분을 쌓고자 친박 중진을 먼저 쳐내는, 친박 핵심부의 ‘육참골단(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취한다는 의미) 전략’과 맥이 닿아있는 이유에서였다.
비박 진영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앞서의 수도권 비박계 의원은 “청와대와 핵심 친박 의원실이 명단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나돌았다. 친박 핵심부 의중을 김 대표나 공천관리위원회에 전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도 “18대 국회 때의 친박 학살, 19대 때의 친이 학살 때도 살생부가 돌았다. 물갈이 대상이 비박에 집중돼 있다면 친박 쪽에서 만들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친박 측은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총선을 앞두고 아무런 실익도 없는 리스트를 만들어 괜한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다. 김 대표로부터 살생부 발언을 들었다는 정두언 의원의 폭로 직후 <일요신문>과 통화한 친박 의원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백 번 양보해서 친박이 살생부를 만들었다고 치자. 그걸 왜 김 대표에게 전하나. 이한구 위원장에게 전하지. 애초부터 앞뒤가 안 맞는다. 누군가는 거짓을 말했거나 김 대표의 자작극”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정치권에서 돌고 있는 물갈이 리스트는 실체가 불분명하다. 이번에 김 대표가 친박 핵심 관계자로부터 전달받았다는 ‘40인 살생부’ 역시 마찬가지다. 김 대표는 “제 입으로 공천과 관련된 문건, 살생부 운운한 바 없다”며 “당 대표로서 국민과 당원에게 심려를 끼쳐 드린 점에 대해서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김학용 대표 비서실장도 “정두언 의원과는 정치권에 회자되는 이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라고 부인했다. 살생부 논란으로 친박계의 집중 포화를 받자 재빨리 진화에 나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카더라’에 가까워 보이는 살생부를, 그것도 친박의 거센 공격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김 대표가 왜 정 의원에게 얘기했느냐는 것이다. 물론 정 의원이 허위 주장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우세한 관측이다. 그렇다면 이번 살생부 파문은 일정 부분 김 대표 측의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게 개연성이 높다. 이재광 정치평론가도 “이한구 위원장과의 공천 전쟁 중에 벌어진 일이다. 공천과 관련된 김 대표의 노림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김 대표가 친박 핵심부를 향한 불쾌감을 표출한 것이란 해석도 나오고 있다. 상향식공천(비박)과 우선추천제(친박)를 놓고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가운데 친박이 정체불명의 리스트를 활용해 김 대표를 압박하자 모종의 액션을 취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김 대표 주변에선 “참을 만큼 참았다” “찌라시를 만드는 불순한 세력을 밝혀내자” 등과 같은 다소 감정 섞인 말들이 새어나온 바 있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이보다는 고도의 전략이 담겨있다는 데 무게가 실린다. 김 대표 측근으로 분류되는 한 비박계 의원은 “김 대표 정도의 내공 있는 정치인이 단지 자존심 때문에 말을 꺼낼 것 같으냐. 더군다나 물갈이와 같은 민감한 사안을 두고 말이다. 김 대표가 살생부 파동 이후 신속하게 대처하는 것도 어쩌면 미리 준비된 스탠스일 수 있다. 김 대표가 본격적인 공천을 앞두고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겉으로만 봤을 땐 살생부 파문으로 김 대표는 곤혹스러운 처지임에 분명하다. 김 대표는 친박으로부터 ‘3김 시대의 정치공작’이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몇몇 친박 의원은 여전히 김 대표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김 대표가 공천의 공정성을 저해했다며 당 클린공천위원회의 강도 높은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클린공천위원회는 이미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에 따라 김 대표로선 자칫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정치 9단’을 꿈꾸는 김 대표의 숨은 한 수에 주목하고 있다. 당장엔 십자포화를 맞으며 위기에 빠지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코 손해만은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는 얘기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무엇보다 총선을 앞두고 각개전투를 벌이던 비박이 결집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학살을 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하나가 된 것이다. 그 선봉엔 김 대표가 있었다”면서 “다소 모호했던 비박계라는 정치세력의 실질적인 좌장으로 올라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향후 대권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점쳤다. 앞서 언급한 김 대표 측근 의원도 흡사한 입장이었다.
“앞으로 이 위원장이 더 난처하게 될 수 있다. 살생부에 올랐다는 비박 의원들을 컷오프 하는 데 애를 먹을 수 있다. 애매모호했던 살생부를 김 대표가 수면 위로 꺼내면서 오히려 실체가 그려졌다. 이 위원장으로선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살생부에 발목이 잡힐 수 있다. 이 위원장과의 공천 전쟁에서 다소 밀리는 감이 있던 김 대표가 회심의 카드를 던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