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도 대통령도 우릴 외면…국정원에 호소했더니 5만원 쥐어주더라”
꽃샘추위가 절정이던 삼일절 이튿날인 지난 2일이 되자 대구 기온은 전국 최고인 영상 13도를 웃돌며 봄의 시작을 가장 먼저 알려왔다. 목련 꽃망울마저 금방이라도 필 듯 한껏 부풀어 있었다. 1984년 대구무장간첩사건으로 어머니 전갑숙 씨를 잃은 김병집 씨와의 만남은 이렇게 가득한 봄 기운 속에서 이뤄졌다. 친근한 이미지의 김 씨는 환한 웃음을 보이며 먼저 기자에게 인사를 건넸고, 어색한 분위기 없이 순조롭게 인터뷰가 시작됐다. 생후 10개월 만에 고아가 된 이후 33년 동안 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지낸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마치 재밌는 영화 한 편을 소개하듯 덤덤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지난 2014년 1월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당시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할머니 고 임춘자 씨(당시 78세)가 그날 처음으로 며느리의 사망에 대해 입을 열었다고 한다. 유년 시절에는 “아빠와 함께 미국에 살고 있다”고 했고, 사춘기 시절에는 “아빠가 죽고 3개월 후에 엄마가 단순 사고로 죽었다”고 했었단다.
유난히 추웠던 그날 할머니는 “네 엄마는 간첩한테 총에 맞아 죽었다”면서 오래된 신문 기사 자료를 꺼내 보여줬다고 한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지만 자신이 7세이던 해인 1991년 12월 한 신문에 할머니와 자신이 함께 찍힌 사진이 게재된 기사를 보고나자 어머니가 간첩에 의해 살해됐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단다. 해당 기사의 제목은 ‘84년 무장간첩에 며느리 잃은 임춘자 씨’였으며, ‘정부 무관심 속 응어리만 깊어’, ‘핏덩이 손자 업고 행상으로 생계’ 등의 부제가 할머니의 애환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당시 할머니는 그에게 “지지리도 가난해서 막상 손자를 홀로 키우기가 겁이 났었다. 정부 보상을 받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해 검찰에도 접촉해보고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탄원서도 보내봤지만 소용없었다. 두고두고 한으로 남는다. 네게 남겨줄 재산 한 푼 없으니 이제라도 네가 할머니의 한을 대신 풀어다오”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대구무장간첩사건 피해자 유족 김병집 씨.
김 씨가 보여준 어머니 전 씨 사망 관련 자료는 기자에게도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사건은 1984년 9월 24일 대구시 동구 신암2동에 소재한 전 씨가 운영하던 희민식당에서 발생했다. 신원미상의 간첩이 오후 1시경 희민식당에 침입해 전 씨와 식당 종업원 강명자 씨(사망당시 20세)에게 소음기가 달린 벨기에제 브로닝 6.35구경 권총 수발을 쏘아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살해했다. 간첩은 체포 위기에 놓이자 소지하고 있던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
당시 수사본부는 발건 발생 4일 만에 신원미상의 간첩이 사용했던 권총이 1980년 발생한 횡간도 침투사건에서 무장공비가 사용했던 권총과 같다는 점과 북괴만이 사용하는 MUV 인력식 퓨지 장착 자폭용 혁대버클을 착용했다는 점을 미뤄 남파간첩임이 최종 확인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김 씨는 당시 수사본부가 부모와 간첩의 관계 조사를 위해 어머니보다 3개월 앞서 돌아가신 아버지 김진한 씨(사망당시 31세)의 시신을 다시 꺼내 독살 혐의를 살펴본 점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수사 결과 김 씨의 부모는 간첩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 씨는 “어머니가 부산 미문화원 앞에서 장사를 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미 땅에 묻힌 아버지의 시신을 다시 꺼냈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아들의 생애 첫 생일도 챙겨주지 못한 채 간첩에 의해 무고하게 돌아가신 어머니가 많이 억울해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 간첩만 아니었다면 (나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외롭지 않게 자랐을 것”이라면서 “손자를 키우기 위해 30년 가까이 시장에서 대포집 장사를 하던 할머니도 폐암으로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 시간 가까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오던 김 씨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
김 씨는 어머니 사망과 관련된 자료를 취합하면서 국가정보원(국정원)에서 근무하는 관계자 두 사람을 2014년 8월에 만나게 됐다고 한다. 당시 그들은 김 씨에게 “1984년에는 국가에서 보상금을 지원해 줄 만한 관련법이 마련돼 있지 않았었고 지금은 소멸시효가 지나 보상해줄 의무가 없다”면서 “국가보안법상 어머니 사망과 관련된 자료는 일체 보여줄 수 없다”고 전했단다. 그렇게 한 시간에 걸쳐 만난 국정원 관계자는 극구 받지 않겠다던 김 씨에게 5만 원을 억지로 건네줬다고 한다.
인터뷰 도중 김병집 씨는 국정원 관계자가 억지로 주고 갔다는 5만 원을 꺼내 보여줬다.
할머니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두 차례에 걸쳐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김 씨는 공적평가서와 공소 폐기 및 국고귀속처분 관련 서면을 발송하지 않은 대구광역시와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기 위해 법률구조공단에 두 차례에 걸쳐 국선 변호사 선임 및 범죄피해보상을 신청했으나 소멸시효 기간이 10년이라는 점을 이유로 모두 기각처리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김 씨는 지난 2005년 12월 16일 유엔 총회에서 국가에 인권침해 피해자를 대우하고 손해배상을 책임질 의무가 있으며 의무의 소멸시효가 없다는 기본 원칙이 채택됐고, 당시 한국 정부도 총회에 참석해 해당 원칙에 찬성표를 던진 점, 그리고 헌법 제6조에 따라 헌법에 의해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된 점 등을 이유로 대구광역시와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를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고의든 과실이든 간에 간첩에 의해 국민의 한 사람인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남겨진 유족은 그동안 외롭고 힘들게 살아왔다”고 호소했다.
지난해 11월 대구지방법원에 또 다시 손해배상청구 소장을 제출한 김 씨는 소장이 기각되지 않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지난 33년 동안 힘들어했을 김 씨의 고난에 국가가 진지하게 귀기울일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유시혁 기자 evernur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