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상향식 공천 치명상·원유철 리더십 훼손 ‘득보다 실’
이한구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이 지난 4일 오전 당사에서 당내 지역 예비후보 여론조사 문건 유출과 관련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김무성=눈이나 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존재감을 전혀 부각하지 못했다. 일기예보로 따지면 눈이나 비가 내리는 상태다. 필리버스터 정국을 도래시킨 장본인으로 몰렸고 청와대와 친박계로부턴 ‘레이저’를 맞았다는 평가다.
필리버스터가 한창일 무렵 친박계 핵심 중진은 사석에서 “김 대표가 성급하게 선거구 재획정안(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을 합의했다. 우리가 줄기차게 ‘쟁점 먼저, 선거는 나중’이라고 했는데 한 귀로 흘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대표와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로 지난 2월 23일 만나 본회의 처리를 합의했다.
친박계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친박은 선거구 획정이 밀릴수록 상향식 공천이 유야무야되고 시간에 쫓겨 공천관리위원회에 힘이 실리길 바랐다”며 “결국 필리버스터로 동력을 모은 더민주가 필리버스터가 끝나자마자 ‘야권통합’을 외치지 않았나. 필리버스터 여진이 이번 총선에서 변수가 된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3·1절 행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주승용 국민의당 원내대표와는 인사하고선 김 대표를 그냥 지나치는 모습,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아주 밉보였단 얘기다.
김 대표에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새누리당 지지층도 결집하고 더민주 지지층도 강화됐단 것이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안이 연일 보도되면서 보수가 총결집했다. 김 대표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았고 새누리당 지지도 40%대를 유지하고 있다. 새누리당 현역들은 선거구 획정안을 처리해 경선의 길이 열리면서 김 대표에게 의지하게 됐고, 이들이 살아 돌아온다면 김 대표에게는 큰 아군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 대표는 정두언 의원과 나눈 ‘살생부 파문’으로 절반을 얻고 절반을 잃었다. 살생부라는 단어 때문에 친박계가 자기 마음대로 공천하기 어렵게 재갈을 물렸다. 대신 당 대표로서 ‘가볍다’는 지적을 피할 순 없게 됐다. 당분간 ‘흐림’ 상태가 지속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 유승민=구름 많음
사실 김무성 대표는 정두언 의원에 앞서 유승민 의원과 먼저 통화했다. 유 의원은 언론에 관련 내용을 흘리지 않았다. 그 사이 유 의원 대항마인 이재만 전 대구 동구청장은 여론조사 조작 지시 파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유 의원과 친한 동료들은 이번 문건에서 알려지거나 보도된 것과 달리 열세를 면치 못하거나 진박 예비후보들과 박빙 구도다. 유 의원은 사석에서 “나 혼자 살아 돌아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선구자’인 유승민 의원은 필리버스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현재 여의도 정국에 관해선 ‘묵언 전략’이다. 하지만 ‘테러방지법-유엔 안보리 대북제재-한반도 사드 배치’가 맞물리면서 안보에 보수적인 유 의원을 자르기가 힘들어질 것이란 말이 종합편성채널 등을 통해 전파되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가 지난 2월 29일 국회 로텐더홀 계단에서 필리버스터 즉각 중단을 요구하는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이한구=맑음
살생부 파문 속에서도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거세게 대응했다. 당 최고위원회에 관련 조사를 의뢰하면서 맞섰다. 여론조사 문건도 당 조직의 여의도연구원 탓으로 돌리면서 빠져나갔다. 주변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갈 길 가겠다는 ‘마이웨이’ 전략이다.
필리버스터 정국 속에서 존재감을 가장 알렸던 이도 이한구 위원장이다. 국회가 사실상 마비되면서 여권의 모든 눈은 공천 과정에 쏠렸고, 이 위원장은 사사건건 김 대표와 대립각을 세웠다. 일개 의원일 뿐인 이 위원장의 ‘공천 완장’은 친박계의 보이지 않는 지원 속에서 빛났다.
“시원찮은 놈은 걸러내겠다” “정치적 소수자를 위해 우선추천과 단수추천을 확대하겠다” “경선에 안 붙여야겠다면 안 붙인다” 등등의 발언은 김 대표의 ‘상향식 공천’을 전면 부정하는 대목이다. 친박계 ‘입 큰 개구리’들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 위원장 호위무사를 자처했다.
이 위원장은 필리버스터를 ‘즐겼다’. 김 대표의 선거구 재획정 협상안에 대한 본회의 처리가 미뤄지면서 이 위원장은 모든 탓을 그쪽으로 돌렸다. “선거구도 없는데 어떻게 경선 지역을 선정하느냐”는 논리였다. 미뤄질수록 시간은 촉박해지고 경선이 불가능한 시기가 오면 일종의 ‘하향식 공천’의 길이 열린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 대표가 자꾸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 원유철=구름 많음
스스로 ‘신친박’을 자처한 원유철 원내대표는 청와대의 마음에 쏙 들었을지는 몰라도 19대 현역 의원들로부턴 비토의 대상이 됐다. 테러방지법과 선거구 획정안 처리를 위해 여의도 인근 대기 지시를 내린 원 원내대표는 현역들의 지역구 다지기를 막은 셈이다. 지난 본회의 직전 열린 의총에서는 몇몇 의원들의 성토가 이어졌는데 한 의원이 전한 대화를 대략 이렇다.
“저 XX 다 아는 내용을 가지고 또 XX한다. 테러방지법 취지는 왜 설명하노? 이종걸(더민주 원내대표)하고 협상 안 됐다고 만날 징징대고…(경북 친박계 중진).”
“자기가 뭐 협상권이 있나. 만날 전화 받으러 나가더니 우리 눈치는 안 보고 저쪽 눈치만 보는 거지(강원 출신 의원).”
촌각을 다툴 시간에 여의도에 발 묶인 현역 의원들의 원내지도부 성토는 의총 내내 이어졌다. 공천 파문 속에서는 관련한 입장 표명은 전혀 없는 상태다. 게다가 최경환 의원을 비롯한 친박계 핵심부는 필리버스터로 시간을 번 동안 향후 전략 마련에 분주했다는 전언도 있다. ‘진박 마케팅’으로도 좀처럼 뜨지 않는 예비후보들의 지원을 비롯해 박 대통령의 우회 지원까지 염두에 뒀다는 얘기다. 최근 정가에선 박 대통령이 며칠에 어디를 간다느니, 동선이 이렇다느니 청와대 쪽에 촉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공천을 둘러싼 파문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김 대표가 ‘찌라시 살생부’ 파문을 불러왔다면 친박계는 ‘여론조사 살생부’로 대응한 셈이다. 살생부 3라운드는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지켜볼 일이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