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차떼기 악몽’… 여야 모두 다친다
▲ 1000억 원대에 이르는 현대차 비자금의 ‘용처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정치권이 긴장하고 있다. 사진은 정몽구 회장이 지난 4월 24일 대검청사에 출두하는 모습과 28일 구치소로 향하기 위해 차에 오르는 모습(오른쪽).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특히 정치권에서는 글로비스 등에서 조성된 비자금의 일부가 지난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으로 유입됐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향후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지난 2003년 대선자금 수사에서 밝혀진 ‘차떼기’ 자금 외에 제3의 불법 정치자금이 나올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게 될 경우 지방선거를 앞둔 한나라당으로서는 ‘제2의 차떼기 정국’으로 내몰려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한나라당은 자체 조사 결과 더 이상의 현대차 불법 대선자금은 없는 것으로 확인했지만 그래도 ‘돌발 변수’가 터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열린우리당 역시 조심스레 사태 추이를 지켜보는 모습이다. 현대차 비자금이 대선자금이나 정치자금과 연관있을 경우 여당 역시 ‘자유롭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몇몇 인사의 경우엔 정가 ‘괴담’을 통해 이름까지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검찰의 칼끝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검찰은 정몽구 현대차 그룹 회장의 구속으로 홀가분한 표정이다. 수사의 큰 고비를 넘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경제 위기론’을 부추기며 정 회장의 구속 반대를 강하게 외쳤지만 법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검찰의 의중이 그대로 반영됐다는 평가다. 이제 검찰은 1000억 원대의 현대차 비자금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캐는 ‘출구 조사’를 본격화할 예정이다. 이에 정치권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특히 검찰은 정 회장을 전격 구속시킨 여세를 몰아 대 정치권 용처 수사에도 더욱 칼끝을 높이 들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 비자금 용처 수사는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될 전망이다. 정 회장 부자의 경영승계나 개인 용도 등으로 쓰인 부분과 정·관계 로비나 정치자금으로 쓰인 부분이 그것. 이 가운데 정가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바로 정치권 유입 쪽이다.
검찰은 지난 3월 말 현대기아차 그룹 본사에 대한 전격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비자금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암시해주는 ‘장부’를 확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권에서는 압수수색 직후 거물급 정치인 A 의원과 초선 B 의원이 수억 원대의 현대차 비자금을 받았다는 소문이 좍 퍼졌다. 여기에는 여권의 고위 인사 C 씨의 이름도 오르내렸다. 이 소문이 사실일 경우 정치권의 대권 구도까지도 흔들 만큼 폭발력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특히 지방선거 뒤 정계개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었던 만큼 정치권에서는 소문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분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 뒤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닌 쪽으로 정리되고 있다. 먼저 검찰은 “압수된 ‘장부’에 정치인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적시된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지난 3월 말 검찰 압수수색 직후 유력 정치인들의 이름과 받은 액수까지 구체적으로 거명된 적이 있어 당 차원에서 조사를 해본 적이 있다. 우리가 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다 동원해 확인해본 결과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최종 판단했다”고 밝혔다.
정치인 로비 리스트보다 더 큰 폭발력이 있는 것은 현대차 비자금의 2002년 대선자금 연루 여부다. 검찰이 정 회장의 구속영장에 기재한 비자금 횡령액은 1300억 원으로 알려졌다. 현대차는 이 돈으로 정의선 사장의 경영권 승계 자금을 마련하고 김재록 씨와 김동훈 씨를 통해 각종 로비에 활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노조 관리와 각종 접대비에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최근 공개된 한나라당 내부보고 문건에는 ‘글로비스 비자금이 지난 2002년 대선자금의 일부이며 금고에서 나온 돈은 빙산의 일각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검찰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금시초문”이라며 펄쩍 뛰고 있지만 이번 현대차 비자금 사건이 지난 2002년 불법 대선자금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일각에서는 점쳐지고 있다.
왜냐하면 지난 2003년 대선자금 수사 당시 검찰이 현대차가 한나라당에 제공한 100억 원의 출처를 두고 정주영 회장 개인재산과 현대그룹 비자금 사이에서 오락가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검찰 주변에서는 “검찰이 수사 협조를 이끌어내고자 총수들의 불기소를 조건으로 기업과 ‘협상’을 했을 수도 있다. 재벌이 천문학적인 돈을 정치권에 건넸다는 점만 확인됐을 뿐 돈의 출처나 조성 방법 등은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이런 연원 때문인지 다시 대선자금의 출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검찰도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검찰이 이 부분에 대해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현대차 비자금이 불법 대선자금과 연루된 것으로 밝혀질 경우 지방선거의 판도는 물론 대권 구도마저 바꿀 ‘핵폭탄’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먼저 한나라당 한 핵심 전략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이 관계자는 “최근 일부에서 흘러나오는 현대차 비자금과 불법 대선자금 연루설은 한나라당의 차떼기 이미지를 재현시켜 지방선거에서 낭패를 보게 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현대차 비자금의 대선자금 연루설이 나도는 것을 보면 누군가가 이번 사건을 자꾸 증폭시키는 것 같다.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현대차가 한나라당에 줄을 선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때 받은 100억 원 외에 더 이상의 불법 정치자금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 차원에서 당시 대선자금 창구였던 서정우 변호사를 통해 확인해본 결과 ‘그때 받은 자금 이외에는 더 받은 것이 없다’는 확언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한 “그럼에도 검찰 주변에서 자꾸 대선자금 연루설이 나오는 것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제2의 차떼기 정국으로 몰아갈 음모가 숨어있는 것 같다. 검찰이 여당을 도와주려고 그런 이야기를 흘리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현재 내부 검토 끝에 내린 결론은 현대차 비자금과 지난 2002년 대선자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현재 지방선거를 앞두고 검찰의 용처 수사를 면밀하게 스크린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구조사와 함께 검찰의 칼끝은 이제 정치권으로 향하고 있다. 만약 검찰이 현대차 비자금과 2002년 대선자금의 관련성을 집중적으로 파헤칠 경우 돌발변수로 인해 한나라당이 제2의 차떼기 정국으로 내몰릴 가능성도 있다.
또한 여당으로서도 몹시 곤혹스런 입장에 빠질 만한 개연성이 있다. 당시 노무현 후보쪽에 전달됐던 자금이 6억 6000만 원으로 밝혀졌는데 한나라당(100억 원)에 비해 여권에 전달된 대선자금이 턱없이 적다는 의혹이 적지 않았다. 이번 현대차 비자금 수사에서 당시 여권에 제공한 추가 대선자금이 일부라도 드러난다면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휩싸일 가능성도 크다.
과연 현대차 비자금으로 인해 제2의 대선자금 정국이 시작되는 걸까. 현재로선 검찰의 ‘칼끝’에서 그 답을 찾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