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일으켜야 판이 바뀐다
▲ 석가탄신일인 지난 5일 조계사에서 열린 봉축행사에 참석한 서울시장 후보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러한 ‘습관적’인 투표 성향은 비교적 선거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이 ‘마의 벽’인 지지율 40%대를 넘어설 정도로 호조를 보이고 있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20% 안팎에서 헤매는 국면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흐름이 선거 당일까지 이어진다면 한나라당 승리는 ‘떼어 논 당상’이다. 여기에는 “그간 지방선거에서 인물이 당을 넘어선 적이 없다”는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경험칙’도 작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선거란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것’. 어쩌면 5·31 지방선거의 향배를 가를 수도 있는 4대 ‘변수’를 따라가 봤다.
공천비리 ‘지뢰밭’
5월 31일 자정 정도가 되면 전국 광역단체장 16명, 기초단체장 232명, 광역의원 733명, 기초의원 2888명 등 총 3869명의 새로운 지방 선량이 배출된다. 여야가 지방선거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좌우할 ‘행복한’ 성적표를 받기 위해선 수많은 ‘지뢰밭’을 통과해야 한다. 아무리 능력 있는 후보라 하더라도 밖에서 터져 나오는 ‘외생 변수’에 대해서는 손을 쓸 수가 없다.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은 공천 비리와 같은 돌발변수다. 최근 한나라당이 김덕룡 박성범 의원의 공천 비리에 이어 고조흥 의원의 공천 헌금 비리 의혹까지 ‘이실직고’하는 까닭도 선거전 도중에 검찰에 의해 비리가 발각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예방주사’를 미리 놓자는 의도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남 지역의 특정 동문들을 중심으로 한 또 다른 공천 헌금 비리 사건이 터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당 지도부가 바짝 긴장한 상태다.
민주당도 조재환 사무총장의 공천 비리 사건으로 해당 지역 후보에 대한 막대한 피해는 물론 기존 지지층의 이탈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대형 악재는 향후 정계개편 과정에서 민주당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2007년 대선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며 당 관계자들은 우려하고 있다.
공천 비리와 같은 변수는 유권자들에게 정치권 전반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겨 투표율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여기에 선거기간 동안 현대차 비자금의 용처와 김재록 씨 관련 의혹이 특정 정당과 연관 있는 것으로 밝혀질 경우 지방선거의 대세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TV토론과 인터넷
미디어도 지방선거의 주요 변수다. 이것은 크게 TV 토론과 인터넷 변수로 나눌 수 있다.
TV 토론이 역대 지방선거에서 후보자의 당락을 바꿀 정도의 위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학문적으로 검증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변수 가운데서도 TV 토론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지난 2002년 6·13 지방선거 때 한나라당은 이명박 후보가, 민주당은 김민석 후보가 각각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다. 선거를 20여 일 앞둔 시점에서 당시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김민석 후보(32.2%)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32%)에 불과 0.2%포인트를 앞서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실시된 TV 토론에서 처음에 사람들은 김 후보의 일방적 우세를 점쳤다. 당시 김 후보는 젊고 유능하며 수려한 용모로 차기 대권주자로까지 거론되는 등 차기 지도자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반면 이명박 후보는 전형적인 기업가 이미지에 어눌한 말투로 국민들의 호감을 얻기에 힘이 부쳐 보였다.
하지만 TV 토론에서 김민석 후보는 언변에서 앞서자 교만한 자세를 보이며 이명박 후보의 기업가적 공적까지 깎아내리는 ‘오버’를 범하고 말았다. 당시 후일담을 잠시 살펴보자.
TV 토론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토론 내내 쩔쩔 매던 모습을 보이던 이명박 후보는 자신도 모르게 “어휴, 말로는 못 당하겠구만…”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후보는 뜻하지 않은 그 말 한마디로 서울시민들에게 김민석 후보는 말만 잘하는 ‘말꾼’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TV 토론은 김 후보의 논리적인 언변에도 불구하고 ‘솔직한’ 이 후보에게 더 후한 점수가 매겨졌다. 결국 이 후보는 박빙의 승부를 보이던 선거에서 52.3%의 득표율로 43%의 김 후보를 비교적 여유 있게 이기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TV 토론은 적잖은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시장 선거에 나온 강금실 열린우리당 후보와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 모두 TV 토론이 거리유세와 같은 직접적인 선거운동보다 훨씬 파급효과가 크고, 전체 선거전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주요 변수의 하나라는 지적에 동의하고 있다. 이 때문에 두 후보는 선거일까지 10여 차례 예정돼 있는 TV 토론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강 후보 측은 오 후보와 처음 대결한 TV 토론에서 “강단 있고 당찬 모습을 보여줬다”고 자평한다. 다만 일각에서는 “강 후보가 몇몇 질문에서 핵심에서 벗어난 답변을 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아쉽다”는 의견을 나타내기도 한다. 강 후보는 남은 기간 열린우리당 의원과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캠프 내 TV 토론팀과 함께 집중적으로 토론회를 준비할 예정이다. 또한 청와대 대변인 출신인 박선숙 선대본부장의 조언도 받을 계획이다.
이에 비해 오 후보 측은 첫 TV 토론에서 “유권자들에게 안정감 있는 모습을 선보였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다만 “오 후보가 너무 온화한 이미지만 강조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오 후보는 9시 뉴스 앵커 및 시사토론 프로그램 진행자 등 방송계에서 30년간 다양한 경력을 쌓은 박찬숙 의원을 미디어위원장으로 임명해 ‘하드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정은 TV 토론이라는 중요 관문을 넘어야 하는 다른 광역단체장 후보들도 마찬가지다. 코디네이터를 동원해 분장과 패션을 다듬고 전문가들로 토론팀을 구성해 자체 리허설을 수없이 실시하는 후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한 언론학자는 “TV 토론은 지난 1995년 지방선거 때 서울시장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그 첫선을 보였다. 우리나라는 1997년 선거법에 대통령 선거 후보자 TV 토론을 의무화할 정도로 미디어 선거에 관한 한 ‘선진국’이다. 하지만 미국 프랑스 등은 아직 법제화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검증되지도 않은 TV 토론을 너무 맹신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터넷은 이미 지난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풍’을 확인시켜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도 가공할 변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특히 강금실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 측은 “젊은층의 투표율을 높이는 데 선거 전략을 집중하고 있다. 그 디딤돌이 되는 게 인터넷 선거전이다. 인터넷이 막판 역전극의 발판을 마련해줄 것”이라며 기대를 걸고 있다.
오세훈 후보의 한 측근은 이에 대해 “오 후보가 크게 앞서고 있지만 가장 걱정하는 것은 인터넷에서 형성되는 젊은층의 스피디한 여론이다. 인터넷은 한번 불길이 번지면 쉽게 잡을 수 없는 산불과 같다. 젊은층이 지방선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인터넷에서부터 그 불길이 일 것”이라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 지난 4일 열린 TV토론회에 참석한 경기지사 후보들. 국회사진기자단 | ||
여론조사 결과도 ‘표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각 당과 언론사에서 발표하는 여론조사에 후보들이 일희일비하는 까닭도 그것이 표와 연결하는 유도체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여론조사전문가는 “우리나라 유권자들의 커다란 특징은 부동층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많다는 데 있다. 전통적 지지세력이 선진국에 비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역대 선거마다 많게는 50% 정도가 넓은 의미의 부동층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유권자들은 선거 당일까지 판단을 유보하면서 당선가능성이 큰 후보를 밀어주는 이른바 ‘전략적 투표’를 하는 경향이 많다. 될 사람을 밀어주는 ‘강자효과’ 때문에 선거기간 바로 직전까지 공표되는 여론조사 결과에 후보들이 목을 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지난 2002년 지방선거 때 여론조사와 실제 당락은 얼마나 일치했을까. 먼저 선거 20여 일 전 공표된 한 언론사의 조사 결과를 보자. 6·13 지방선거 당시 최대 승부처로 꼽혔던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김민석 후보(32.2%)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32%)의 지지율 차이는 0.2%포인트에 불과했다. 경기도에선 한나라당 손학규 후보(28.4%)가 민주당 진념 후보(23.8%)를 오차범위 내인 4.6%포인트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인천에선 한나라당 안상수 후보가 36.4%의 지지율로 14.6%를 얻은 민주당 박상은 후보를 두 배 이상 앞선 것으로 조사됐다.
그렇다면 실제 결과는 어땠을까. 서울시장 선거는 김민석 후보가 박빙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선거운동 기간 동안 역전패했다. 이 후보가 52.3%로 김 후보(43%)를 비교적 여유있게 제쳤다. 경기도에선 손학규 후보가 58.4%를 획득해 36%에 그친 진 후보를 이겼다. 인천은 안 후보가 56.2%를 얻어 32.1%에 얻는 데 그친 박 후보를 거의 더블스코어로 이겼다. 실제 결과는 여론조사보다 더 큰 차이로 한나라당 후보들이 모두 승리했음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부동층의 상당수가 한나라당 후보들에게 표를 던졌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으로 풀이하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현재 수도권 지역의 여론조사를 비교해보자(선거 27일 전 기준). 서울은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50.2%)가 열린우리당 강금실 후보(32.2%)를, 경기에서는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45.0%)가 열린우리당 진대제 후보(24.4%)를 각각 20%포인트 안팎으로 리드하고 있다. 인천은 한나라당 안상수 후보(47.2%)로 최기선 열린우리당 후보(17%)를 크게 앞서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부동층의 표심을 흔들 만한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 같은 여론조사 결과가 선거 당일 때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 정당 지지율도 변수다. 선거가 막판에 가까이 갈수록 후보 개인 지지율은 정당지지도에 대체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각 정당들의 지지율 경쟁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투표율과 젊은층
마지막으로 투표율도 전통적인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2002년 6·13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48%에 그쳤고 이는 민주당의 참패로 이어졌다. 젊은층을 투표소로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열린우리당으로서는 20, 30대의 투표율 제고에 목을 매야 할 형편이다. 여당의 한 의원은 “5월 31일에 53.1% 이상의 투표율을 기록한다면 우리가 승리한다”는 바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격차가 10~15%포인트에 이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투표율이 큰 변수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과연 어떤 돌발변수가 지방선거에 대해 심드렁한 국민 정서를 깨울 수 있을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