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놀림에 내가 놀라 쇼트트랙 미련 버렸어요”
▲ 이준기를 닮았다는 기자의 말에 이강석은 선뜻 “친구들은 이천수 닮았다던데요?”라고 반문했다. 과연 누구를 닮은 걸까. 독자들의 판단이 궁금하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금보다 값진’ 동메달을 따낸 이강석(21·한국체대)은 영화배우 이준기를 닮은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선뜻 이천수란 이름을 꺼내 놓았다. 실제 얼굴은 이준기와 축구선수 이천수의 이미지를 골고루 섞어 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올림픽이 끝나자마다 네덜란드로 날아간 이강석은 지난 5일(한국 시간) 헤렌벤에서 열린 2005~2006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6차 대회 최종일 500m에서 34초98을 기록, 월드컵 통합랭킹 1위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1위를 차지, 그 의미가 더욱 뜻 깊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국내 매스컴에선 월드컵 1위 소식을 단신과 박스 기사 등으로만 처리했다.
귀국 후 갖가지 행사에 정신없이 불려 다니며 시차 적응에 애를 먹고 있는 이강석을 지난 8일 의정부의 한 부대찌개 집에서 만났다.
처음부터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다. 의정부에 왔으니 부대찌개는 먹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강석이 이끄는 데로 유명한 찌개 집을 찾았다. 앉아서 밥을 먹다가 자연스레 술 얘기가 나왔고 한창 어린 나이로만 여겼던 이강석이 대학 4학년이란 소리에 주저 없이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을 외쳤다. 굳이 타이틀을 단다면 올림픽 동메달과 월드컵 1위를 차지한 데 대한 ‘축하주’라고나 할까^^. 이렇게 해서 생각지도 않은 ‘취중토크’가 진행되었다. 사진보다 실물이 백 배는 더 잘 생겼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85년생 ‘토종 꽃미남’과 ○○년생 기자가 ‘세대 공감’을 나눌 수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 리얼토크는 축하주 명목으로 ‘취중토크’가 돼버렸다. | ||
“동메달 딴 후 숙소로 돌아와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그런데 전화기에서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라구요. 그때가 새벽 시간이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엄마한테 ‘집에 무슨 일 생겼느냐’로 물었더니 방송 3사에서 다 나왔다는 거예요. 그 다음날 친구와 통화하는데 뉴스에서 하루 종일 제 얘기만 했대요. 아침 뉴스에서 마감 뉴스까지요. 14년 만에 메달 땄다면서요. 그때 ‘아, 드디어 내가 떴구나’ 싶었죠.”
토리노에서 네덜란드를 거쳐 귀국한 후 집에 들렀다가 아버지가 올림픽 기간 동안 스크랩 해 놓은 신문들을 죄다 읽어봤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이 다른 지면이 아닌 스포츠 신문 1면에 나온 걸 보고 믿기질 않았다고.
“스포츠 신문 1면은 박지성 선수 정도 돼야 나오는 거 아닌가요? 제 이름 석자가 1면에도 나오고, 정말 놀라운 경험이에요. 기분 좋더라구요. 이래서 그 힘든 거 다 참아가면서 운동하는 건가 봐요.”
이강석은 토리노 올림픽에서 동메달 확정 후 태극기를 들고 빙판 위를 돌던 상황을 그려냈다.
“전 원래 5위가 목표였거든요. 그래서 메달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러다 동메달을 땄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코치 선생님이 태극기를 건네 주시더라구요. 태극기를 휘날리며 도는데 갑자기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김)동성이 형이 태극기 흔들며 도는 장면이 생각나대요. 그걸 제가 하고 있으니 어디 실감이 났겠어요?”
스케이트 입문과 라이벌
가죽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분에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던 이강석의 어머니는 여섯 살 때 이강석을 YMCA에 보내 스케이트를 가르쳤다. 그땐 단순히 취미 생활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스케이트 잘 탄다는 칭찬에 초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중1 때부터 점점 재미가 없어졌어요. 성적도 안 나오더라구요. 중2, 3학년 때는 전국대회에서 입상도 못했어요. 이게 내 한계인가 싶었죠. 침체기를 겪다가 고교 진학 후 조금씩 기록이 나왔어요. 고1보다는 고2가, 고3이, 그리고 대학 1학년으로 갈수록 점점 기록이 업그레이드 되는 거예요.”
선배이자 경쟁자인 이규혁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표현할 만큼 실력 차이가 두드러졌다고 한다. 그러다 대학 1학년 정도 되면서부터 엇비슷한 수준이 되었는데 그래도 이규혁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실력은 엇비슷한 것 같은데 계속 지더라구요. 원인을 분석했죠. (이)규혁이 형은 노련미로, 전 자신감과 패기로 싸웠어요. 노련미가 자신감을 압도했어요. 그런데 작년부터 노련미가 자신감한테 쫓기는 것 같더라구요. 한 번 이기니까 그 후론 계속 1등을 했어요. 자신감 상승에다 탄력을 받은 거였죠.”
▲ 이강석이 지난 5일 네덜란드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에서 ‘우승 역주’를 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이강석이 중1 때 IMF가 터졌다. 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부도를 맞아 공장은 물론 살던 집에다 차까지 모두 다른 사람 손에 넘겨줘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시골의 외할머니 댁으로 온 가족이 이사를 갔다고 한다. 주위엔 온통 논밭뿐이었고 학교에 가려면 자전거를 타고 30분이나 가야 했으며 소똥 냄새 나는 곳에서 식사를 해야 했던 열악한 상황이었다.
“동생이랑 같이 많이 울었어요. 그래도 형이랍시고 동생 앞에선 안 울려고 했는데 생활이 너무 크게 달라지니까 적응이 안 되더라구요. 그러다 아버지가 공장을 일으키려고 새벽부터 나가서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때 운동을 그만둘 뻔했지만 부모님이 어떻게 해서든 뒷바라지하겠다고 하셔서 계속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죠.”
힘든 여건에서 운동을 해도 기록이 안 날 땐 스피드스케이팅에 대한 원망도 생겼단다. 처음부터 스피드가 아닌 쇼트트랙을 탔더라면 조금은 쉬운 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도 한몫했다.
“쇼트트랙으로 바꿔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아니 줄곧 그런 생각에 빠져 지낸 적도 있었죠. 쇼트트랙은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강국이잖아요. 스피드는 웬만큼 해선 외국 선수들을 따라 잡기가 어려워요. 그러다 500m에서 제 능력을 발견했어요. 비디오 분석 결과 국내에서 500m를 뛰는 선수 중 제 피치 수가 100m에 32개가 되더라구요. 다른 선수들은 저보다 4~6개가 부족한 거예요. 거기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500m에서 정상에 오른 것도 이 피치 수 덕분입니다.”
피치 수라는 건 쉽게 말해서 100m 동안 발의 움직임 수다. 즉 다른 선수보다 발 움직임이 많다보니까 기록이 좋게 나올 수 있었던 것. 그런데 왜 1000m에선 좋은 성적이 안 나는 걸까?
“장거리는 체격 조건이 아주 중요해요. 선천적으로 긴 다리와 단단한 하체를 갖고 태어난 서양 선수들과 동양 선수들과는 게임이 안 돼요.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전 500m에 ‘올인’하려구요. 그래야 다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노려볼 수 있죠. 3등에서 1등하는 것보다 22등(토리노 동계올림픽 1000m 성적)에서 1등하기가 더 어렵잖아요.”
한때 쇼트트랙으로의 전환을 꿈꾸던 사람이 지금은 스피드스케이팅 예찬론을 편다. “스피드스케이팅은 남자다운 경기예요. 한마디로 젠틀하죠. 둘이 붙어서 기록 빠른 ‘놈’이 이기는 거니까요. 발을 걸 필요도, 손 들고 액션 취할 필요도 없는 깔끔한 경기죠”라면서 말이다.
여자친구와 허벅지의 비밀
훤칠한 외모 때문에 여자 친구가 많을 것 같다고 유도 질문을 하자 “내 밥그릇 챙기기도 힘들고 벅차서 여자 친구 사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발을 뺀다.
“(안)현수와 (신)단비가 예쁘게 사귀는 걸 보면서 내심 부럽기도 하지만 전 원래 운동했던 여자는 안 좋아해요. 그래도 단비를 보면 참 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원래 잘 챙겨주지 못하는 스타일이라 여자가 오래 버티지 못해요.”
인터뷰 말미에 스케이트 선수의 특징인 굵은 허벅지와 관련된 얘기가 화제가 됐다. 바지를 사면 허리보단 허벅지 사이즈에 맞는 옷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 허리가 32인치인데 36인치 바지를 사야 다리가 들어간다고 한다. 기사를 작성하다가 바지를 사면 항상 수선해서 입는다는 그의 허벅지 둘레가 궁금했다. 그래서 이강석한테 문자로 허벅지 둘레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답장이 왔는데 ‘27’이란다. ‘27인치면 굵은 건가?’ 여자의 허리 둘레를 생각하니까 간단하게 답이 나왔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