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은 ‘영남 라이벌’ 김두관
▲ 김혁규 의원이 최고위원직을 사퇴해 ‘김근태 승계론’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사퇴의 진짜 의도는 김두관 최고위원 견제에 있었다는 추측이 높다. | ||
그러나 당초 열린우리당이 계획했던 수습 방안은 ‘비대위 가동’이 아니라 ‘김근태 승계론’이었다. 최고위원회를 유지하면서 전당대회 차순위 득표자인 김근태 의원이 당의장직을 승계하는 방식이었다. 정동영 의장도 사퇴하면서 이를 주문했고 당내 중진들도 대부분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시나리오’가 바뀐 것은 김혁규 최고위원의 사퇴 때문이었다. 김 의원과 조배숙 의원이 최고위원직을 동반 퇴진하면서 최고위원회가 사실상 와해됐고 열린우리당은 비대위를 꾸릴 수밖에 없었다. 정동영 의장은 물론 김근태 의원까지 나서서 김혁규 의원의 사퇴를 말렸지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가 ‘김근태 승계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내막을 들여다본다.
지방선거 이후 열린우리당 지도부 복구 계획을 흔들어버린 김 의원은 우선 비대위원장으로 ‘중립적 인사’를 앉힐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자신의 사퇴가 “특정인에 대한 비토가 아니다”고 해명하면서도 사실상 김근태 의원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한 것이다. 실제 이념적 성향으로 따진다면 당내에서 실용파로 분류되는 김혁규 의원과 개혁파의 선봉인 김근태 의원은 서로 맞지 않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이번 갈등이 이념 투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김혁규 의원이 노리는 실제 표적은 김근태 신임 당 의장이 아니라 김두관 전 최고위원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열린우리당 내 ‘영남 맹주’ 자리를 놓고 두 사람이 이미 선전포고를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김혁규 의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김두관 전 최고위원의 사퇴를 설득하자는 의견도 있었다”며 “만약 김 전 최고위원이 먼저 사퇴를 발표했다면 김 의원이 ‘김근태 승계론’을 용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김근태 의장 측의 설득으로 김두관 전 최고위원은 선거기간 중 ‘정동영 의장 퇴진 요구’에 대한 사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퇴가 아닌 사과로는 김혁규 의원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 2·18 전대. | ||
김혁규 의원과 김두관 전 최고위원의 경쟁 관계는 지난 2·18 전당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명직 최고위원(당시 상임중앙위원)을 맡고 있던 김혁규 의원은 선출직 출마를 앞두고 ‘영남 후보 단일화’를 강하게 요구했다. 실제 김혁규 의원의 설득으로 부산시당 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원호 의원은 출마를 포기했다. 덕분에 여성 최고위원 자리는 조배숙 의원에게 돌아갔다. 당시 김혁규 의원은 김두관 전 최고위원에게도 출마 포기를 강하게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참정연’ 조직표를 업고 있던 김두관 전 최고위원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결국 2월 18일 열린 전당대회 결과는 김두관 전 최고위원의 승리였다. 김두관 전 최고위원은 3218표를 얻어 3위를 차지하며 김혁규 의원(2820표)을 4위로 밀어냈다. 그러나 국회의원과 중앙위원이 선거권을 갖는 예비선거에서는 김혁규 의원이 179표를 얻어 김두관 전 최고위원(164표)을 크게 앞섰다. 또 2위를 차지한 김근태 의원(182표)과의 표차도 3표에 불과했다.
당시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김혁규 후보는 이념적으로는 실용파에 속하지만 친노 직계인 의정연구회의 지지를 받고 있어 지지기반의 폭이 상당히 넓다”며 “전당대회에서 영남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더라면 김근태 후보를 이겼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도 김혁규 의원은 김두관 전 최고위원과 경남에서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는 후문이다. 관선에 이어 세 차례 민선 경남지사를 지내면서 지역적 지지기반을 다져 놓은 김 의원은 경남에서 기초단체장 2명을 당선시키는 저력을 과시했다. 또 무소속 당선자 3명이 ‘김혁규 사람’이라는 소문도 나돈다. 특히 열린우리당이 수도권에서 거의 전패한 상황에서 경남에서의 선전이 더욱 값진 것으로 평가됐다.
반면 남해군수를 지낸 김두관 전 최고위원은 이번에 경남지사 후보로 직접 선거에 뛰어들었다. 비록 선거에서는 큰 차이로 패했지만 공식 조직을 이용해 공개적으로 영남에서 지지기반을 확장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득이 만만치 않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가 결국 김혁규 의원의 견제를 불렀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김혁규 의원이 열린우리당 내 영남 맹주가 된다면 이후에는 본격적인 대권 행보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열린우리당이 현재 구도로 경선을 치른다면 김 의원이 영남을 장악할 경우 승산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정치분석가는 “김혁규 의원의 영남 기반은 한나라당의 지역적 기반을 효과적으로 허물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며 “향후 전개될 정계개편 과정에서 ‘동서화합론’이 힘을 받을 경우 김 의원의 입지는 한층 강화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정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