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자마자 또 하나의 ‘산’이…
▲ 2002 월드컵 당시 포르투갈전에서 골을 넣은 후 기뻐하는 박지성(오른쪽). | ||
부모라면 아무리 고생을 바가지로 한다고 해도 자식만 잘 되면 모든 시름을 잊는 법이다. 지금 박성종 씨의 마음이 딱 그럴 것 같다.
지성이가 고3 때의 일이다. 수원공고 축구부가 창단 21년 만에 제주서 벌어진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 경기는 지성이가 고등학교에서 갖는 마지막 게임이었다. 만약 팀이 우승을 하지 못한다면 대학 진학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는 중요한 대회였다. 마침내 결승전에서 홈팀인 제주고교선발팀과 붙은 수원공고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그 당시 현장에서 수원공고의 우승을 지켜봤던 나로선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 관중석에 앉아서 엉엉 소리내며 울기까지 했다. 그 감격, 그 감동! 정말 지금 돌이켜봐도 너무나 생생하다.
수원시 측에서는 체전 우승이 너무나 기쁜 나머지 축구부가 돌아올 때 신갈 IC부터 카퍼레이드를 기획했고 실제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호송은 군인 차량이 맡았던 걸로 기억된다. 축구 명문팀이 그 장면을 지켜봤더라면 한참 웃을 일이었지만 그만큼 창단 첫 우승이 기쁘고 영광스러웠던 것이다.
지성이는 그 대회 이후 자신감이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평소에 대학 못 가면 통닭집이나 차리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걸 기억해서인지 우승 직후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나 통닭집 안 차려도 되겠죠?”
하루는 왜 그 많은 장사 중에서 하필이면 통닭집을 하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가 하고 있는 정육점 옆에 바로 통닭집이 있어서 그 영향을 받은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지성이 대답이 걸작이다. “아빠, 옆집 보니까 치킨집은 오전에 문을 안 열더라구요. 오후 늦게부터 여니까 오전에 조기축구회나 하고 늦게 치킨집 열면 진짜 괜찮을 것 같아서요.”
정말 생활 감각이 없는 녀석이었다. 생맥주를 파는 치킨집이다 보니 저녁 장사만 했는데 지성이는 속내용은 보지 못하고 뒤늦게 장사하는 걸 무척 쉬운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여튼 전국체전 우승으로 지성이는 치킨집 대신 대학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 스타로 자리매김한 후 박지성과 그 가족들. 얼굴이 모두 환하다. | ||
결국 명지대로 결정이 난 뒤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데 어찌나 가슴이 떨리고 울렁거리든지….전공을 체육교육학과로 정한 것은 운동 선수로 성공 못할 경우 교사 임용이라도 돼서 밥벌이를 했으면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성이는 고3 겨울방학 때부터 명지대 예비 신입생이 돼 미리 훈련에 합류했다. 1999년 1월 울산에서 명지대가 합숙훈련을 했는데 마침 울산에서 전지훈련을 하던 시드니올림픽대표팀과 연습 경기를 치르게 됐다. 지성이는 예비 신입생이었지만 출전을 하게 됐고 이때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친 게 허정무 감독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하루는 지성이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아빠, 제가 대표팀에 뽑혔대요. 청소년대표팀이 아닌 올림픽대표팀 말예요.”
난 도통 지성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대표팀은 고사하고 상비군에도 뽑히지 못한 녀석이 어떻게 올림픽대표팀에 발탁됐다고 하는지, 지성이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다음날 진짜로 지성이가 올림픽대표팀에 뽑혔다는 발표가 나왔다.
아! 아! 정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대학에만 가면 소원 성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올림픽대표팀이라니, 믿기지 않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난 그 즉시 시장으로 달려가 친한 상가 사람들한테 지성이가 대표팀에 뽑혔다고 자랑했다. 그들은 지성이가 공 좀 차는 축구 선수로만 알았지 대표 선수로 뽑힐 만한 ‘물건’이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그 즈음 효창운동장에서 벌어진 대학춘계연맹전을 구경하러 갔다가 학부모들이 모여서 쑤군거리는 얘기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나이가 좀 돼 보이는 분이 이런 말을 흘렸다. “이번에 허정무 감독이 이상한 애 하나 뽑아 놓고 욕 많이 먹나봐.” “박지성인가 뭔가 하는 앤데 체격도 왜소하고 별 볼일 없어 보이던데 뭘 보고 뽑았는지 모르겠어.” “혹시 걔 뒤에 뭐가 있는 거 아냐?”
내가 지성이 아버지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내 뒤에서 한창 지성이의 대표팀 발탁과 관련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이쯤되면 조금씩 허정무 감독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된다. 괜히 내 자식 때문에 감독이 욕을 먹는 것 같아 몸둘 바를 몰랐다. 지성이가 대표팀에 뽑힌 뒤 난 두 다리 뻗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산’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산’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