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배’도 내겐 ‘약’이 된다
▲ 지방선거 참패 후 열린우리당을 수습하기 위해 지난 7일 의원·중앙위원 연석회의가 열렸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김근태 신임 당의장의 표정이 자못 비장하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9일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위원장에 선임된 김근태(GT) 신임 의장의 일성이다.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지도부 공백과 계파 간 이해관계가 맞물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던 열린우리당 내홍이 GT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 체제 출범과 함께 일시 봉합되는 국면을 맞고 있다.
하지만 비대위의 역할과 권한, 비대위원 구성을 둘러싼 계파간의 치열한 기싸움 여진은 여전히 수면 아래서 꿈틀거리고 있다. 특히 장고 끝에 ‘구원투수’ 역할을 수락한 GT의 ‘대권복심’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악의 선거 패배와 지지율 급락, 불투명한 7월 재·보선, 정계개편 소용돌이 등 짊어져야 할 버거운 현안이 산적해 있음에도 GT는 결국 ‘정면돌파’ 카드를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좌초 위기에 처한 열린우리당호를 구할 비책 내지는 대권 해법을 찾아낸 것일까. 대망론과 맞물린 GT의 마지막 대도박 카드가 향후 본격화 될 대권정국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GT가 장고 끝에 표류하고 있는 여권호 선장을 맡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책임감’이란 표면적 이유 외에 대권 복심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 1일 지방선거 참패에 따른 책임을 지고 당 의장직에서 물러난 정동영(DY) 전 의장에게 ‘의장직 승계’를 제안 받은 이후 9일 당 의장에 최종 선임되기까지 GT는 숙고와 미래 구상을 거듭했다. 총체적 위기상황에 직면한 여권의 현실을 감안하면 GT의 선택과 역할은 그의 향후 대권 플랜 및 정치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고를 거듭하던 GT는 구원투수직을 ‘독배’에 비유하며 수락 의지를 피력했고 9일 당 의장에 선임돼 실질적인 여당 1인자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제 갓 출항한 GT호가 순항할지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곳곳에 숨겨져 있는 암초와 험난한 파고를 헤쳐나가야 한다.
항해 중간에 암초에 부딪칠 수도 있고 높은 파고를 만나 휘청거릴 수도 있다. 또 실패하든 성공하든 항해와 관련한 모든 업적과 책임은 이제 선장인 GT 몫으로 넘겨졌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그의 비대위 위원장 취임을 대권을 겨냥한 GT의 마지막 승부수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다.
일부 측근들은 “DY가 물러난 마당에 GT마저 ‘나 몰라라’ 한다면 공멸할 수밖에 없다”며 GT를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GT계 모임에서도 당과 GT의 지지율을 감안하면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가 필요한 만큼 이번 위기상황을 기회로 승부수를 던지자는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DY와 함께 여권 내에서 차기 경쟁을 펼치고 있는 GT는 그동안 DY의 그늘에 가려 늘 ‘2인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2004년 1월 열린우리당 초대 당 의장 선거에서 DY가 당선된 이후 GT는 줄곧 DY에게 밀렸다. 2004년 7월 입각 경쟁에서도 두 사람 모두 통일부 장관을 원했지만 노 대통령은 DY에게 힘을 실어줬고 GT는 어쩔 수 없이 복지부 장관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또 지난 2·18 전당대회를 앞두고 GT계는 당 의장 출마 여부를 놓고 속앓이를 한 적도 있다. DY와 맞장 승부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패할 경우 정치적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승부를 피할 수도 없었다. 결과를 어느 정도 예단(DY 승리)하면서도 GT는 결국 정면승부를 선택했다. 당시 GT계 일각에서는 당 의장 선거에서 패하는 것이 오히려 GT의 대권행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결과론이지만 DY는 당 의장에 당선돼 5·31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했지만 최악의 참패라는 성적표만 남긴 채 백의종군하는 처지가 됐다. GT계가 이러한 시나리오를 예상했다면 “독배라도 마시겠다”는 GT의 결의도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DY계 인사들은 GT의 장고 이면에는 비대위원장의 역할과 권한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치밀한 전략이 내포돼 있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GT계의 한 초선의원은 기자에게 “대권 경쟁자인 DY가 GT에게 당 의장 승계를 권유했던 것은 자신을 대리한 ‘형식적 의장’을 염두에 둔 것이지 결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의장 승계가 아니었을 것”이라며 “DY가 당분간은 정치행보를 자제할 것이지만 선거 후폭풍이 가라앉으면 다시 대권행보를 걸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초선의원은 또 “GT도 여당이 처한 최대 위기상황을 기회로 삼아 DY나 제3후보보다 경쟁력 있는 차기주자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을 것”이라며 “장고 기간에 당권 장악 플랜 및 향후 대권 구상의 밑그림도 그려 놨을 것”이라고 전했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GT가 대도박을 시도하고 있는 만큼 세부적인 전략도 마련해 놨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 당 수습을 책임지게 된 김근태 의원이 향후 노무현 대통령과 결별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월 청와대 만찬에 참석해 건배하는 김 의원과 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계파간·대권주자 간 헤게모니 싸움과 맞물려 GT를 견제하고자 하는 세력도 늘어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당권이 GT 쪽으로 기울 가능성도 점쳐진다.
당권을 장악한다면 GT는 향후 전개될 대권정국과 정계개편 과정에서도 핵심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 GT 스스로 ‘대망론’을 꿈꾸고 있는 만큼 수렁에 빠진 당을 재정비해 경쟁력 있는 여권 주자로 본선에 나서는 게 가장 이상적인 전략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 결과에 반영된 성난 민심을 감안하면 여권은 환골탈태와 함께 대권 전략도 전면 재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시기와 명분이 문제지 어떤 식으로든 정계개편이 추진될 것이란 정치권의 시각도 이러한 상황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GT계도 정계개편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하더라도 당권을 담보로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전략이다. GT계 일각에서는 고건 전 총리와의 전략적 연대를 물밑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GT는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지금까지 ‘범민주개혁세력 연합론’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정권재창출이라는 최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고 전 총리든 민주당이든 전략적 연대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GT의 이러한 연합론에 대해 DY계 일각에서는 ‘고건-GT 대권 밀약설’ 의혹을 제기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또 정치권 일각에서는 GT가 대망론을 포기하고 ‘킹 메이커’ 역할로 궤도를 수정했다는 말도 나돌고 있다. 2%를 밑돌고 있는 지지율을 고려할 때 무리하게 대권을 욕심내는 것보다 킹메이커 역할로 지분을 축적한 뒤 차차기를 기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
노 대통령과의 결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당장은 당·청 모두 여권내 갈등 진화에 공감하고 있어 유기적인 협력체제를 유지하겠지만 노 대통령과 GT의 정치 스타일과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비춰볼 때 두 사람의 마찰과 갈등은 불가피할 것이란 시각이 많다.
GT는 복지부 장관 시절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문제를 놓고 청와대와 ‘계급장 떼고 붙자’며 대립각을 세운 적도 있다. 여기에 정계개편 움직임이 본격화될 경우 GT가 주장하는 ‘연합론’과 지역구도 타파를 주장하는 노 대통령의 ‘소신론’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대권 복심을 싣고 항해를 시작한 GT호가 숨겨진 암초와 파고를 헤치고 순항할 수 있을지 또 항해 과정에서 거대한 태풍(정계개편)을 만나게 될 경우 GT는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할지 그의 항해술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