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없다 기다림이 있을 뿐
잉글랜드전 때 보여준 그 중거리 슛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맘 먹고 그런 멋진 골을 쏠 수 있었는지, 히딩크 감독의 작전이었는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전술이 아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감독이 롱킥을 못하게 한다. 마침 내 앞에 공간이 비어 있었고 내가 치고 나갈 경우 다른 선수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 것 같아 하프라인을 넘어선 것이다. 감독의 지시가 아닌 순전히 혼자 결정해서 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수비는 수비대로 최선을 다하되 찬스가 생긴다면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서도 아니고 언론에 이름 내려고 안달나서 그러는 것 또한 아니다. 상대팀에는 혼란을, 우리팀에는 공격의 활로를 찾게 해주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대표팀 선수들 중 홍명보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반듯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선 내면에서 겪는 갈등과 스트레스도 무척 많을 것 같다.
“이름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행동을 하려고 의식하며 살다보니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항상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스트레스를 준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데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월드컵이라 심적 부담이 크다. 인간이 결코 완벽할 수 없는 건데 ‘홍명보’란 이름에 거는 기대치를 생각 안할 수가 없다.”
‘보도용’ 나이가 33세지만 실제는 34세. 과연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후배들과 함께 뛰고 구르는 훈련이 버겁지는 않은지 ‘방송용 멘트’가 아닌 솔직한 느낌을 듣고 싶다고 했다. 정말 솔직히 얘기한다는 말이 “체력은 전혀 문제가 없다”였다. 체력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면 대표팀 생활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체력보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좋지 않은 결과를 낼지 모른다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프랑스전에서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친 우리 대표팀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상대팀 실력이 기대 이하였다고 폄하하는 의견도 있다. 그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들이 100% 전력을 발휘하지 않아 예상 외로 우리팀이 선전할 수 있었다. 아쉬운 면이다. 그러나 강한 자신감을 얻은 것은 큰 소득이다. 특히 경기 초반 긴장을 금세 풀 수 있었던 것은 돈 주고도 못살 경험이다.”
천하의 홍명보도 강팀을 만나게 되면 경기 전부터 긴장이 된다고 털어놓았다. 지난해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한테 0-5로 진 뒤론 유럽의 강팀을 상대하기 전부터 가슴 한켠에서 이상한 떨림이 전해온다고 한다. 축구를 알면 알수록 이런 증상이 더 심해진다고 말하는 그가 새삼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마이클 오언, 지네딘 지단 등 세계적인 톱스타 플레이어들을 상대한 소감이 궁금했다. 언론의 지나친 관심만큼 선수에 대한 개인적인 흥미가 있었을까. 대답은 ‘아니올시다’다. 침착하게 경기운영을 해나가는 부분은 분명 배울 점이지만 선수 개인에 대해선 별다른 관심이 없다고. 오히려 유명선수보다 그렇지 않은 선수들이 선전할 때 더 감동하고 충격을 받는다. 간혹 그들 중에서 또다른 스타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홍명보는 자신의 이름 앞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카리스마’란 단어가 싫다. “평소 말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도 말수 적은 것과 카리스마와는 다른 색깔이 아닌가. 하도 카리스마, 카리스마 하니까 정말 없는 카리스마라도 만들어야 할 것만 같다.”
월드컵이 다가올수록 긴장이 목을 타고 올라올 만큼 떨린다. 다행인 것은 선수들의 사기와 자신감이 충만해 있다는 것. 누구처럼 8강도 자신있다고는 얘기할 수 없지만 첫승과 16강에 대해선 기대치를 높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16강을 입에 올리는 성급함은 자제하려고 애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98프랑스월드컵 때와 지금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물었다.
“그땐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다림이 있을 뿐이다.”
역시 홍명보다운 대답이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
선배 고정운이 말하는 ‘홍명보’
16강 희망은 그가 있기 때문
책임감 강하고 말도 별로 없고 무뚝뚝한 스타일이라 결혼을 못할 줄 알았다.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스타일이라 기대도 안했는데 아내 조수미씨를 만나 결혼하는 걸 보고는 참으로 기특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명보의 장점은 축구도 잘하고 놀기도 잘한다는 사실이다. 평상시엔 결코 가벼운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도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서 소주잔을 기울일 때는 한마디로 방방 뜬다. 20대 중반에 황선홍, 강철 등과 함께 어울려 다니며 광란의 밤을 보내기도 했는데 가장 잘 놀았던 사람이 명보였다.
‘출전 멤버’들 중 술이 제일 세고 노래도 아주 잘한다. 노래를 듣다보면 절로 반하게 될 정도다.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생활하며 이런 자리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선홍이와 명보가 은퇴하면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지극히 ‘사적인’자리를 갖고 싶다.
같은 남자로서 명보가 좋은 이유는 속이 깊고 한결같다는 것이다. 또 신중하다보니 실수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동안 대표팀에서 나와 있으며 부상과 정신적 스트레스로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했던 말이 절대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홍명보가 없는 대표팀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그가 선수생활을 하는 한 히딩크 감독이 그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한국의 16강 진출이 점차 희망적으로 부각되는 중심에는 명보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어쩌면 역대 월드컵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가 뭔가 큰 일을 저지를 지 모른다.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