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나우디뉴,‘숫자놀음’ 좀 깨뜨려줘
▲ 현란한 개인기 위에 현대 축구가 요구하는 빠른 템포와 공간 파괴력을 겸비한 호나우디뉴. 그가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 눈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 | ||
그런데 우리들은 포메이션만 가지고도 현대 축구, 특히 월드컵의 시기별 특성을 대충 범주화해 볼 수는 있다. 다소 전문적인 시각이지만 독일 월드컵을 재미있게 보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가면서 본문을 읽었으면 한다.
월드컵 이전에도 대략적인 전술 형태는 있었겠지만 소위 포메이션이란 것이 축구 스타일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던 것은 1958년 브라질이 세계에 선보인 소위 4-2-4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은 중간 허리의 링커가 갖는 역량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체제라 공격 성향의 풀백들이 2명의 중앙 미드필더(이는 지금의 더블 볼란치가 아니다)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으면 엄청난 체력 소모를 수반하는 형태였다. 대부분은 펠레의 활약만을 기억하나 이 시기 가장 중요한 포지션은 가린샤가 맡았던 중앙 플레이메이커 기능이었다.
그리고는 60년대 전반 그 악명 높은 인터밀란의 카테나치오(1-4-3-2)가 나왔고 1966년에는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알프 렘지가 유명한 ‘윙 없는 4-4-2’를 내세우면서 월드컵 우승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는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보비 챨튼이 시스템의 엔진 역할을 담당했다. 수비시는 4-4-2, 공격시는 4-3-3으로 유연하게 변형했던 전술이 결국 ‘윙 없는 기적’(wingless wonders)의 축구를 가능하게 했다.
그 다음은 지금까지 잘 알려진 요한 크라이프의 토털 풋볼. 거의 같은 시기에 베켄바우어는 스리백 뒤에 처진 스위퍼 시스템의 운용으로 70년대 바이에른 뮌헨의 챔피언스컵 3연패를 견인했고 72년 유럽컵, 74년 월드컵을 안았다.
▲ 압박수비가 기형적으로 발달한 현대 축구에선 기교를 보기 어렵다. 수비 축구의 대명사인 이탈리아의 경기 모습. 연합뉴스 | ||
결과적으로 80년대부터 미드필드 운용이 가장 중시되는 경향이 지속되면서 어떻게 하면 미드필드와 공격, 미드필드와 수비라인을 짜 맞출 것인가를 심각히 고민하는 와중에 다양한 포메이션이 개발되어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FIFA 보고서가 말한 대로 포메이션 변화에 의거한 ‘플레이 스타일(playing style)’일 뿐 궁극적으로 축구의 기본 전술 개념이 변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이번 독일 월드컵에선 어떤 양식, 어떤 포메이션이 득세할 것인가. 최근 유럽챔피언스리그 진출국들의 양상을 보면 대개 원톱 스트라이커 밑에 미드필더들을 좍 깔아놓는 4-5-1 시스템이 중용되는 추세인 듯하다. 여전히 미드필드에서의 압박과 지배가 승부의 주요 변수로 해석된다.
이러한 숫자 놀음에 해당하는 포메이션의 변화가 경기 전체를 다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온난한 독일 여름 기후의 조건상 또다시 압박 축구의 유령이 배회하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86년 멕시코, 94년 미국 월드컵이 그리 재미있었던 이유는 고지대 산소 부족으로 미드필드 운동량이 극도로 제한되었거나 워낙 날씨가 무더웠던 탓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미드필드에서부터의 압박과 사전 차단을 운용할 수 없어 대부분 지역 방어 전술로 대처했었기에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속도도 빠른 데다 테크닉 넘치는 플레이어들이 공을 다소 오래 갖고 놀면서 관중들을 즐겁게 했었다.
오늘날처럼 압박 수비가 기형적으로 발달한 상황에서는 과거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했던 드리블러들의 기교를 볼 수 없는 것이 최대의 유감이다. 브라질의 데니우손이나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가 잔재주를 부리면 타이밍을 늦춘다고 관중과 언론도 난리들이다. 반대로 융베리나 웨인 루니가 60~70년대에 나왔다면 무식하고 정신없는 축구를 한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현대 축구는 테크닉과 전술 개념보다 스피드란 개념이 두서너 발짝 더 앞서간 불균형적인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이번 대회에서도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줄 예술가가 나올 것인가. 스피드라면 프랑스의 앙리를 빼놓을 수 없겠지만 아무래도 남미 출신들에 비해 세련됨이 떨어진다. 전술적 이해도나 킬러패스의 묘미로 보자면 브라질의 카카, 아르헨티나의 리켈메, 잉글랜드의 램퍼드, 독일의 발락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상대에게 섬뜩하리만치 위협을 주거나 수비진을 찢고 나갈 듯한 저돌적 파괴력은 어떤 음료수 이름처럼 2% 부족하다.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존재는 역시 브라질의 호나우디뉴일 것 같다. 70년대 우승 브라질 멤버들이 갖고 있던 현란한 개인기 위에 현대 축구가 요구하는 빠른 템포와 공간 파괴의 센스가 있는 선수니까.
2002 월드컵 대표팀 미디어 담당관
현 독일대사관 참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