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아래 ‘용’들의 대리전 후끈
▲ 한나라당의 대권주자들. 왼쪽부터 박근혜 전 대표,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하지만 한나라당의 경우 공천이 곧 금배지로 이어지는 듯한 분위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물밑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더욱이 일부 선거지역은 공천 결과에 따라 당내의 권력 구도를 뒤바꿀 바로미터로 작용할 수 있어서 계파 간 신경전도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7·26 선거는 재·보궐의 의미를 넘어서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나라당 권력 충돌의 또 다른 축소판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재·보궐선거 공천경쟁을 둘러싼 막전막후 이야기를 몇 가지 맥으로 짚어봤다.
3김 시대는 갔다. 그때는 당 총재가 공천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희망자들은 줄 대기에 바빴다. 하지만 지금 한나라당의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공천은 당 공천심사위원회에서 협의한 뒤 최고위원회의에서 최종 추인된다. 당의 권력자가 공천권을 독단적으로 휘두를 수 없도록 했다. 그럼에도 공천이 완전히 ‘자유경쟁 지대’가 된 것은 아니다. 당내 유력 대권 후보들이 향후의 대선 후보 경선을 대비해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사들을 원내에 ‘밀어넣기’ 위해 암중 모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재·보궐 선거의 공천 경쟁은 당내 대권주자들 간 권력 충돌의 최접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박근혜 전 대표는 이번 공천 경쟁에서 가장 우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지난 6월 15일 퇴임한 뒤 재·보궐 선거 공천과 관련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내에는 ‘박심’이 물밑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비록 박 전 대표가 공식적으로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허태열 사무총장 등의 ‘대리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박심’이 전해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특히 허 총장이 공천심사위원들을 임명했기 때문에 박 전 대표의 의중이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지방선거 이후 박 전 대표 대세론이 형성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천심사위원들이 박 전 대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위험한 공천’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공천 경쟁이 박 전 대표 측의 ‘독주’ 양상으로 가는 것에 대해 ‘라이벌’ 이명박 서울시장 측은 크게 개의치 않겠다는 모습이다. 한 측근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시장과 가까운 인사가 원내에 많이 진입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문제는 이 시장이 앞으로 어떤 비전을 제시해 한나라당 의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시장 측은 공천 경쟁 초기 그의 최측근인 정태근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서울 성북 을에 ‘심으려’ 했었다. 하지만 이 시장의 최측근이라는 이유 때문에 당내의 비토 기류가 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친박 체제’인 공천심사위원회 위원들이 이 시장 쪽 사람에게 공천을 주기도 쉽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도 나왔다.
결국 정 부시장은 후보자 공모에 응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공천을 신청했다면 재·보궐 선거 지역 중 가장 치열한 박근혜-이명박 대리전이 성북 을에서 펼쳐질 뻔했다. 그럼에도 이 시장 측은 재·보궐 선거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과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의 한 측근은 “퇴임 후 7월 한 달 동안은 특강에 집중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지방을 돌면서 정책투어를 할 예정이다. 또한 7·26 재·보궐 선거 때는 정치인으로는 처음으로 지원유세를 할 수도 있다. 이 시장이 대중적 인기가 높기 때문에 아마 여러 곳에서 지원 요청이 있을 것으로 본다. 수락 여부는 그때 가서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공천 경쟁에서 주춤하고 있는 사이 손학규 경기도지사 측은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손 지사는 최근 기자에게 “재·보궐 선거에서 꼭 내 사람을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과거 줄 세우기식 구태 정치다. 하지만 내 성격상 한 번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는다. 그래서 내게 불리하지 않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밀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나라당 공천 경쟁은 대권 주자들간의 ‘작은 경선’이자 7·11 전당대회를 앞둔 당권 주자들 간의 대리전으로도 번지고 있다. 전당대회에서는 이재오 현 원내대표와 강재섭 전 원내대표 간의 치열한 접전이 예상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강삼재 전 사무총장의 마산 갑 공천을 두고 신경전을 펼치고 있는 것.
강 전 대표는 최근 강삼재 전 의원에 대해 “2007년 대선에서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오늘, 이제는 당이 강 전 의원과 같은 분들에게 일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줘야 한다”며 강 전 의원의 정계복귀를 적극 주장했다. 하지만 이 원내대표는 “재·보선 공천은 미래지향적인 흐름에 부합해야 한다”며 강삼재 전 의원 등의 공천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공천은 공정한 평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당을 위해 헌신한 사람을 구시대 인물로 평가절하해선 곤란하다. 그리고 재·보궐 공천이 당권 경쟁의 도구로 전락해 특정 인사에 대한 비토 분위기로 흐르는 건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 2007년 대선을 위해서 어떤 인물을 뽑아야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이번 공천 경쟁에서 특정 거물 인사들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공천 과정에서 최병렬 전 대표 등이 컴백을 간절히 원했지만 결국 그 꿈을 접은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회창 전 총재의 경우 자신의 ‘대리인’을 국회에 진입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꿈을 품으려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서울 송파 갑은 현재 공천경쟁의 힘겨루기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곳이다. 한나라당 표밭인 데다 맹형규 전 의원의 조직이 건재한 덕분에 공천이 곧 당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 이 전 총재의 특보를 지낸 이흥주 씨가 공천 신청을 내자 그와 친분이 있는 한나라당 A 의원은 “이 전 총재가 정계 복귀를 단단히 결심한 것 같다. 꼭 당선될 지역에 자신의 최측근을 밀어넣어 원내에 자신의 ‘대변인’을 두고 정계복귀 수순을 밟으려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다.
또한 A 의원은 “얼마 전에 이 전 총재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내게 ‘어이, 요즘 얼굴 보기 힘들어’라며 이례적으로 인사를 건네더라. 나는 그 말을 ‘한번 만나서 (정계복귀 등의 현안에 대해) 얘기 한번 듣고 싶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며칠 뒤 이 전 특보가 공천 신청을 했다기에 이 전 총재가 정계복귀에 강한 뜻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됐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나라당 일각에선 이 전 총재가 당내의 가까운 의원들을 만나 ‘자신의 뜻’을 밝혔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 전 총재와 가까운 또 다른 한 의원은 “이 전 총재가 자신과 관계가 깊은 주진우 전 의원, 정인봉 전 의원 등을 언급하면서 굳이 공천 희망 1순위를 두자면 이흥주 전 특보가 공천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나타냈다”고 전했다.
하지만 당 안팎에서는 “이 전 총재에 대한 예우는 필요하지만 무리하게 배려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이에 한 공천심사위원은 사견임을 전제로 “특정 인사에 대한 언급은 적절치 않다. 다만 좀 더 미래지향적인 인물을 선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전 총재가 이흥주 전 특보를 강하게 밀고 있는 것에 대한 당내 반발도 커지고 있다. 이방호 정책위원장은 최근 “이회창에 대한 배려라니 말도 안 된다. 아예 외부인사를 영입해야 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털어놓은 바 있다. 공천심사위원들 사이에서도 “‘이회창의 부활’이 한나라당의 장래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것을 감안하면 이 전 총재의 컴백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7·26 재·보궐 공천경쟁은 한나라당 소장파의 정치적 위상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다. 소장파는 강삼재 전 사무총장 등 ‘과거 전력’ 인물들의 대거 당 복귀 움직임과 공천헌금 파문으로 검찰에 고발된 김덕룡 의원의 ‘정치 재개설’ 등을 강력 비판하고 있다. 공천심사위원인 박형준 의원은 공천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면서도 “후보는 미래지향적인 인물이 돼야 한다는 원칙에 찬성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소장파의 ‘과거 인사 무조건 반대’ 원칙에 대해 당 중진들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있다. 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에 대해 “지역 패권 구도나 과거 인물 영입이 안 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당의 미래를 책임질 새 인물들이 얼마나 검증을 받은 ‘새로운’ 인물인지도 의심스럽고 무엇보다 당에 경륜 있는 인사들이 거의 고사직전에 있는데 그것이 과연 내년 대선에 얼마나 도움을 줄지 의심스럽다. ‘정치적 고려장’은 소장파의 권력 독점을 심화시키는 또 다른 구태 정치가 될 수도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나라당은 7·26 재·보궐 선거의 공천 결정을 6월 30일까지 완료할 예정이다. 그때 공천자 리스트를 통해서 ‘박근혜 대세론’이 굳어질지 이회창 전 총재의 ‘정계복귀’가 가능할지 또 소장파의 목소리가 더 커질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