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에 부딪칠수록 내 큰꿈은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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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 에인절스와 공식 입단계약을 맺은 고교생 에이스 정영일.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난 11일 광주 진흥고 부근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정영일은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표정으로 이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불과 이틀 전에 LA 에인절스와 공식 입단 계약을 맺은 달뜬 선수의 얼굴이 아니었던 것. 계약금으로만 ‘100만 달러의 사나이’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광주 진흥고 에이스로 훈련에 열중하면서 동료 선수들과 숙소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188㎝ 96㎏의 건장한 체격의 정영일은 이미 중학교 3학년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지난 4월 대통령배 고교대회에서 국내 야구 최다 탈삼진 신기록을 세워 초고교급 투수로 관심을 모았었다.
연고지팀인 기아로부터 1차 지명을 받았지만 ‘고생을 각오하고’ 미국행을 결정한 정영일을 만나본다.
홀가분한 듯했다. 한 달 반 정도를 고민과 갈등 속에서 머물다 ‘마침표’를 찍고 나온 후련함이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훨씬 앞서 있었다.
고등학생인데다 인터뷰를 많이 해보지 못한 정영일로선 뭔가를 끊임없이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무척 부담스러웠겠지만 조금은 떨리고 조금은 수줍은 음성으로 야구에 대한 열정과 각오를 쏟아냈다. 식사를 한 탓에 녹음기를 켜 놓고 인터뷰를 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정영일의 대답보다는 기자의 장황한 얘기들(예를 들면 박지성, 이승엽도 도전 정신이 돋보였다, 미국 가선 무조건 적극적으로 팀 생활에 덤벼들어라,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최향남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해주는 등등)이 훨씬 많아서 정작 기사로 쓸 게 별로 없는 황당한(?) 상황도 벌어졌다.
정영일의 입단 소식이 알려지자 야구인들 중 몇몇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며 우려와 걱정을 나타냈지만 기자가 만난 정영일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의 꿈을 이뤄보겠다는 각오가 남달랐고 대책 없는 ‘망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적인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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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영일(가운데)과 부친 정종호 씨. 왼쪽은 진흥고에서 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친동생 형식. | ||
“고3 올라가면서 미국 진출에 대한 확신이 섰어요. 관심을 보이는 미국 스카우트들이 늘어나는 걸 알았거든요. 그중에서도 에인절스 측이 가장 적극적이었어요. 이미 기아에 1차 지명을 당한 터라 우선협상기간 전에는 접촉해오지 못했는데 기간이 지나자 이전에 모은 자료들을 모두 제시하며 절 데려가려고 준비했던 정성을 보여줬죠. 다른 팀들도 있었지만 저에 대해 끊임 없이 관심을 표현했던 에인절스를 택할 수밖에 없었어요.”
정영일에게 원초적인 고민이 있었다면 ‘떠나느냐 남느냐’하는 문제였다. 기아행과 에인절스행을 놓고 갈등을 하면서 한때 우상으로 생각했던 학교 선배이자 기아 소속인 김진우에게 SOS를 요청하기도 했었다. 김진우는 ‘가서 고생하느니 차라리 한국에서 뛰다가 FA가 된 후 미국에 가도 늦지 않다’며 후배의 험난한 길을 만류했지만 정영일은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욱 큰 의지를 다지게 됐다고 한다.
“전 솔직히 돈의 액수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어요. 부모님도 마찬가지셨구요. 항간에서는 기아에서 5억을 제시했느니 7억을 제시했느니 하지만 저한테는 숫자일 뿐 돈으로 느껴지지 않더라구요. 부모님께서 저에게 모든 결정권을 맡기셨거든요. 부담이 없었던 전 현실보다는 꿈을 선택할 수 있었죠.”
어떤 선배는 마이너리그에서 생활하면 하루에 12시간씩 버스를 타야 하고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빈번하며 인종 차별 때문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최악의 상황만 나열하면서 반대를 하기도 했었단다. 그럴 때마다 정영일은 ‘몇 년을 마이너리그에서 생활해도 내가 선택한 길인만큼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때까지 버틸 것’이라고 오히려 그 선배를 설득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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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4월 대통령배 때 역투 모습. | ||
“고1과 고2 때는 29번을 달았거든요. 그러나 고3 올라가면서 55번으로 바꿨어요. 시속 155km를 목표로 삼으면서 번호를 55번으로 변경한 거죠.”
정영일은 본업인 투수뿐만 아니라 타격 부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었다. 전국대회에 출전해서 최다 안타상을 받은 적도 있었고 (대회명은 정확하지 않지만) 광주 지역 예선 때는 타격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때 타자로의 전향을 생각해 본적은 있지만 심각하게 고민하진 않았어요. 투수가 좋았으니까요. 특히 전 공을 던질수록 좋은 공이 나와요. 200개든, 300개든 점점 더 좋아져요. 항간에선 혹사 운운하는데 저랑 상관없는 단어입니다. 아직까진 아프거나 고장 난 적도 없으니까요.”
아무리 좋아하는 야구지만 때론 도망치거나 잠적하고 싶을 때도 있는 법. 정영일은 선배들의 구타와 기합이 있을 때마다 ‘내가 왜 야구를 맞아가면서 해야 하나’하는 회의가 든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망칠 용기는 없었다고 토로한다.
“아버지 때문에 그럴 수 없었어요. 얼마나 힘들게 절 뒷바라지 해주셨는데요. 절 꽉 믿고 있는 부모님을 배신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진흥고 야구부에는 정영일의 동생인 투수 정형식(16)이 함께 소속돼 있었다. 우연히 인터뷰 장소에 같이 있게 된 정형식은 형의 미국 진출을 축하하면서도 ‘너무 힘에 의존하지 말고 팔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요령있게 던져달라’라는 어른스런 당부를 건네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야구를 하는 바람에 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바늘과 실이 됐다는 정형식은 형처럼 메이저리그의 꿈을 간직하며 형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정영일은 “마이너리그에서 머물다 중간에 잘려(방출돼)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목소리에 힘을 줬다. 인터뷰를 마무리하겠다고 하자 정영일은 건너편에 앉아 있는 아버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이렇게 운을 뗐다.
“아버지, 다른 건 몰라도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처음 서는 날, 비행기 티켓과 입장권을 보내드릴 테니 꼭 오셔야 해요. 빠른 시일 내에 보내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할게요. 그동안 남몰래 눈물 흘리며 고생하신 일,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