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 같은 최후의 승자’ 김무성 대권행보 숨은그림 찾기
언론에서 너무 자주 다루다 보니 진부한 느낌도 있지만 지난 새누리당 공천 난맥에서 드러나지 않은 숨은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이한구 당 공천관리위원장의 칼춤에 가려져 김무성 대표의 존재감이 미약했던 것은 맞는데, 실은 그가 실리는 다 챙긴 ‘숨은 승자’라는 얘기다. “저 정도 술수면 대권주자로 손색없다”는 여권 관계자의 농반진반 얘기는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0대 총선 공식 선거운동 첫 날인 31일 오후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열린 이성헌(서대문갑) 후보의 유세장에서 이성헌 후보를 업고 있다. 이날 김무성 대표는 “이성헌 후보가 당선되면 집권여당 사무총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고성준 기자 joonko1@ilyo.co.kr
‘살생부’의 존재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친박계발 살생부 논란으로 김 대표는 덕을 봤다. 리스트에 거론된 김무성계나 비박계 대부분이 살아남았다. 살생부 이야기를 슬쩍 언론에 흘린 정두언 의원도 공천을 받아 수혜자가 됐지만 김 대표만큼은 아니다. 김 대표는 당내 세력을 유지하며 대권을 향해 순항할 수 있는 길을 튼 셈이다.
여기에도 김 대표의 술수가 있다. 그는 정 의원에게보다 다른 사람에게 살생부 이야기를 먼저 알렸다. 다만 그 사람이 언론에 해당 이야기를 하지 않은 탓에 정 의원이 수혜를 입은 셈이 됐다. 그 주인공이 바로 유승민 의원이라는 말이 있다. 김 대표 측근은 “유 의원을 직접 만난 것은 아니고 살생부 비슷한 이야기를 전화통화 속에서 해준 것으로 안다”며 “하지만 유 의원은 언론에 말하지 않으면서 결국 탈당까지 가게 됐다. 살생부 피해자 코스프레라도 했으면 새누리당 공천을 받았을지도 모르는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유 의원은 왜 관련 살생부를 발설하지 않았을까. 일각에선 “친박계나 청와대가 유승민 공천 안 줄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사안인데 만약 유 의원이 그런 식으로 나섰다간 ‘저렇게 해서라도 공천을 받고 싶을까’ 생각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두언 의원은 빨랐다. 자신을 자르면 살생부가 사실이 되도록 구도를 만들었고, 이야기도 김 대표가 먼저 꺼냈으니 살생부도 김 대표가 찾아야지 자신이 할 일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던 것이다.
옥새. 우리나라 공천 역사를 일거에 코미디로 만든 이번 파동은 꽤 오랜 기간 다듬어진 시나리오라는 말이 돌고 있다. 상향식 공천이 안 되면 공천장에 도장을 찍지 않겠다는 김 대표의 복선이 있기 훨씬 전부터 “우리가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는 그의 측근과 주변부에서 여러 번 나왔다고 한다.
한 정가 인사는 “모처에서 핵심 측근이 그랬다. 모양이 좀 우습더라도 상향식 공천에 대한 김 대표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수가 분명히 있다고”라며 “당 대표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 그가 버틸 땐 어떻게 되는지 다 계산돼 있다고도 했다”고 전했다.
김 대표가 △공천장에 ‘당인’과 ‘당 대표 직인’ 2개를 찍어야지만 효력이 발생한다는 것 △궐위상태가 될 때 최고위 구성이 가능한지 △누가 대표를 대신해 사회를 볼 수 있는지 △대표를 몰아내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절차 등을 사실상 모두 스크린했다는 얘기가 된다. 언론들이 ‘옥새가 어디 있느냐’에 매몰돼 있는 동안, 그리고 옥새 관련 당헌과 당규를 살피는 동안 김 대표는 법과 당헌·당규가 규정한 절차 속에서 움직인 셈이다.
궐위상태 아닌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공천장 날인만 빼곤 당무를 진행했고, ‘유고’ 상태가 안 되기 위해 부산을 찾아온 원유철 원내대표를 만나 국밥 한 그릇까지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우같은’ 플랜을 두고 정가에선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이냐”는 얘기가 나왔다.
우선 살생부 파문에서도 등장했던 김원용 전 이화여대 교수의 작품이 아니겠느냐는 관측에 무게가 실렸다. 김 전 교수는 김영삼(YS) 정부, 이명박 정부 정권창출의 공신으로도 꼽히는데 지금은 김 대표를 외곽에서 돕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교수는 1992년 대선을 앞두고 YS를 위한 연구모임인 ‘광화문팀’을 이끌었고, 이때 부산으로 동향인 김 대표와 친분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김 대표가 오픈프라이머리가 안 되면 안심번호를 활용한 100% 여론조사 경선으로 가자고 했는데 이에 대한 청와대의 대응에 강하게 대처하라는 문자를 남긴 것도 김 교수였다.
그리고 또 나오는 인사가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A 씨다. 정치를 좀 안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친분 관계를 맺은 그는 김 대표와도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다. 최근까지도 공천정국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는데 여의도 정가에서는 “이런 수 싸움에서 옥새 플랜을 세울 이가 A 씨밖에 없다”며 “과정이야 어쨌든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리라는 것을 이번 파동 속에서 모두가 알게 됐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살생부와 옥새로 힘은 얻은 까닭일까. 김 대표는 이제 대권에 대한 욕심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총선이 끝나면 대표직을 내려놓겠다”는 선공도 예사롭지 않다. 여권 한 관계자는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이기든 지든 친박계는 살생부와 옥새, 무공천 등을 빌미로 김 대표를 향한 전쟁을 선포할 태세였다. 그걸 아는 김 대표가 직을 내려놓겠다고 하니 친박계로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됐다”며 “이젠 김 대표가 자신의 대권가도를 위해 누구를 포스트 김무성으로 내세울지가 주목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의 최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는 의미심장하다. 김 대표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대선 출마에 대해선 “반 총장께서 그런 생각이 있으시다면 자기 정체성에 맞는 정당을 골라 당당히 선언하고 활동하길 바란다. 우리 당은 환영한다”면서 하지만 “민주적 절차에 의해 도전하셔야 한다”고 했다. 대권 경쟁자로서 반 총장을 링 위에 올리겠다는 발언이다.
김 대표는 자신의 대권 도전에 대해서는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면서도 “정치인으로서 청와대와 정부에 있어 봤고, 5선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국정운영에 대해 생각을 안 할 수가 있겠나. 권력의 부침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나름 연구해온 입장에서 그런 것(대통령직)에 대해 조금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 김 대표의 사실상 대권도전 선언인 셈이다.
자신이 살려준 것과 같은 현역들이 모두 살아 돌아온다는 가정하에서 지금 여권, 그리고 당내 영향권에서 그는 가장 앞서 있다. 반 총장의 대중성이 앞설지 몰라도 이번 공천파동 속에서 책임당원과 일반당원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기세다.
이렇게 서자 취급한다면 당비반납소송에 나설 것이라고 하는 당원도 많다. 그래서 차기 대권주자는 당원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룰 속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김 대표가 반 총장과 ‘맞짱’을 뜰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바로 당원인 셈이다.
이제 모든 것이 정리된다. 왜 김 대표가 이번 국회에서 통일역사교실 등 몇 가지의 공부모임을 만들어 유지했는지, 번번이 고개를 숙이면서 청와대와 각을 세우지 않았는지, 친박계의 공세에 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그는 목표가 분명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의 소원한 관계는 최대 약점이다. 현직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을 만들 힘은 없어도 누군가를 대통령이 되지 못하게 하는 힘은 가지고 있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