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100억 준다 해도 이곳에 남겠다”
▲ 이적 첫 경기서 홈런, 다음 경기서 만루 홈런 그리고 안타 행진. 추신수가 클리블랜드에 온 후 오리엔탈 특급 열차로 변모하고 있다. 6년간의 마이너 설움이 이제서야 폭발하는 걸까. 로이터/뉴시스 | ||
이게 무슨 말인가. 자기가 때린 안타 행진을 주인공이 모른다는 게 사실일까.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계속 얘기를 나누면서 그가 진짜로 자신의 기록을 모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기록을 보지도 외우지도 않게 됐다고 한다. 때론 전광판에 떠오른 투수들의 기록도 외우지 않으려 한단다. 한 번 기록을 보게 되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특성으로 인해 한때 ‘기록의 노예’가 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클리블랜드에서 ‘추추 트레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추신수(24)는 사람을 ‘추신수화’ 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1시간 여의 전화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반했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던 것. 2000년 미국으로 건너가 6년간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시간들과 경험들이 그를 더욱 성장시킨 듯 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른 사람한테서만 맛볼 수 있는 깊이와 여유라고나 할까. 인터뷰를 하면서 모처럼 진한 감동과 묘미를 선사한 추신수와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 본다.
―요즘 클리블랜드에서 인기가 장난 아니라고 들었다. 실감하고 있나.
▲클리블랜드에 한국 사람이 한 3000명 정도 산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나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굉장히 좋아해 주신다. 첫 경기에서 홈런 친 다음 날에는 택시 기사들도 아는 척을 하더라. 호텔 종업원들도 그렇고. 너무 많이 알아봐 주셔서 내가 더 놀랐다.
―시애틀에서 이적해 온 시기가 7월 27일이었다. 그런데 이적해온 뒤 첫 경기에서 홈런을 쳤고 그 다음에는 만루 홈런까지 날렸다. 얼마 안 된 시간 동안 굉장히 좋은 성적을 올렸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가끔은 ‘내가 계속 시애틀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처럼 좋은 성적을 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시애틀보다는 클리블랜드가 심적으로 편하다. 시애틀에서 5주 정도 메이저리그 생활을 경험해 봤는데 그때보다 팀을 옮긴 이후 약 10일간의 성적이 훨씬 더 좋았다. 시애틀에는 이치로, 이바녜즈라는 큰 벽이 존재했다. 비싼 연봉을 받는 좋은 선수들이 있는데 어느 구단주가 마이너리그에 있는 선수를 불러 올리겠나. 클리블랜드는 올시즌 성적내는 걸 포기하고 대신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려 한다. 그런 환경적인 요소가 나랑 잘 맞아 떨어진 것 같다.
(추신수는 이치로 얘기를 꺼냈다. 존경하는 선수임은 분명하지만 워낙 표정의 변화가 없어 가까이 다가서기가 참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같은 동양인이라 남다른 친밀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외국 선수들보다 더 친해질 수 없었다는 것.)
▲ 부산고 시절의 추신수. | ||
▲먼저 시애틀 매리너스의 클럽 하우스는 너무 조용했다. 마치 도서관처럼 말이다. 그래서 루키나 마이너리그에서 올라간 선수들은 맘 붙이기가 힘들었다. 메이저리그 선배들의 보살핌이나 배려 등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시애틀에서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 올라간 2주 동안 책을 3권이나 읽었다. 아무도 말을 붙여주지 않으니까 할 일이 없어 책만 읽은 것이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정반대다. 선수들이 서로 챙겨주려 애쓰고 서로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표출한다. 한마디로 가족 같은 분위기다.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올라갔을 때 가장 좋았던 게 뭐였나.
▲음식, 돈, 주위의 시선들? 정말 하늘과 땅 차이다. (돈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달라는 요청에) 내가 트리플A 있을 때 다른 선수들보다 많이 받는 편이었다. 2주에 한 번씩 받는 주급이 4500달러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메이저리그는 2주에 1만 5000달러를 준다. 하루에 100만 원을 버는 셈이다. 이 정도면 많은 거 아닌가? 하지만 나한테 돈은 큰 의미가 없다. 돈이란 남한테 손 벌리지 않고 빚 없이 살 수 있고 가족들이 살 집과 차 한 대 정도 있으면 된다. 만약 한국에서 나에게 100억 원을 준다고 해도 난 마이너리그에 남을 작정이다.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돈은 죽어서 갖고 갈 수 없지만 명예는, 내 이름은 죽어서도 남는 거니까.
(추신수는 겸손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스물네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한창 인터뷰를 하다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엘리베이터 앞’이라고 했다. 경기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서 막 방으로 올라가려던 참에 기자의 전화를 받은 거였다. 그래서 방에 올라가서 편하게 전화 통화를 하지 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느냐고 말하자 추신수 왈, “그러면(엘리베이터를 타면) 전화가 끊어지잖아요.” 그래서 전화를 끊고 5분 후 방에 들어간 추신수와 다시 인터뷰를 했다.)
―2000년 처음으로 미국에 건너갔을 때 힘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 부분이라면.
▲한국에서 야구할 때는 자신감이 굉장했었다. 나보다 야구 잘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할 만큼. 그러나 미국에 와 보니까 나보다 야구 잘 하는 선수들이 너무 많았다. 아니 내가 그들 중에서 가장 야구를 못했다. 이걸 알고 나서 굉장히 큰 충격에 빠졌다. 더욱이 투수로 뽑혀간 줄 알았는데 시애틀에서 타자를 하라고 하니까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시애틀에서 처음부터 타자를 시키려고 했던 건가.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MVP를 탄 것도 투수로서 받았던 것이다. 당시 타격은 별루였다. 시애틀 관계자들이 그 모습을 현장에서 똑똑히 봤는데 왜 나를 타자로 뽑아갔는지 모르겠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겠다. 더욱이 기약 없는 마이너리그 생활 아닌가.
▲동료들이 한두 명씩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속으로 많이 울었다. 특히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생기니까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리키 핸더슨을 떠올렸다. 연봉을 많이 안 받아도 야구를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야구장에 남는다는 그를 생각하면서 용기를 얻었다. 돌이켜보면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시간들이 나에게 ‘보약’이 된 것 같다. 그런 경험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잘 지켜야 하는지를 몰랐을 것이다.
(추신수는 다시 태어나도 야구 선수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야구장에 있을 때가 너무 행복하다는 것. 고달픈 생활이라 해도 야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고통조차 감사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시애틀에선 주로 대타로 출전을 많이 했다. 경기 리듬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겠다.
▲추신수 인생에 ‘대타’란 낱말이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다. 대타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는데 시애틀에서 처음으로 대타 인생을 시작했다. 정말 힘들더라. 가만히 앉아 있다가 안타 치고 홈런 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특히 뭔가 인상적인 플레이를 하려면 한 방을 때려야 하는데 그게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