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노가다’ 본 뒤 눈물 뚝뚝 주먹 불끈
▲ 강릉상고 시절의 설기현(오른쪽). 중학교 때 엄마의 힘겨운 삶을 직접 본 뒤 설기현은 “축구로 꼭 성공하겠다”고 약속했단다. | ||
설기현이 너무 잘나가다보니 어머니 김영자 씨는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화려함, 스포트라이트와는 다소 거리가 있던 아들이 어느 순간부터 집중 취재 대상이 되거나 스타플레이어로 대접 받는 부분 등이 왠지 아들의 생활에 리듬을 잃게 할 수도 있다는 노파심 때문이다.
요즘 기현이랑 전화 통화를 하면 그애의 기분이 상당히 좋은 걸 알 수 있다. 다른 거 다 떠나서 딱 한 가지! ‘주목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고 그로 인해 축구의 재미를 새삼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벨기에 진출 후 레딩 FC 입단 전까지 좋은 일 보다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던 탓에 스스로 잘 안 풀리는 운명이라고 자책한 적도 많은데 흔들림 없이 인고의 세월을 보낸 덕분에 선수로서 대접을 받고 운동을 하고 있으니 너무 대견스럽고 흐뭇할 수밖에 없다.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기현이는 성덕초등학교 김평일 코치가 끌어주고 밀어준 덕분에 축구 선수로 뛸 수 있었다. 착한 성품을 타고난 기현이는 운동하면서 말썽 부리는 걸 몰랐다. 엄마가 힘들게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훈련하는 걸로 보답하려 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기현이가 사고를 쳤다. 선배들이 너무 못살게 굴어 견디기 힘들다면서 축구부를 나온 것이다.
용서가 안 됐다. 무엇보다 김평일 코치에게 면목이 안 섰다. 그래서 기현이를 데리고 간 곳이 내가 일하는 공사판이었다. 벽돌과 시멘트를 나르는 것은 물론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미장 일을 하는 엄마의 모습을 직접 보게 했다.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세우면 다리에 쥐가 나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했다. 허리가 아프다 못해 시려도 다리 뻗고 쉴 수도 없는 일터에서 기현이는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중간 중간 힘들게 일하는 날 도우려 했지만 어린 아이가 공사판 일을 하기란 어려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리를 절다시피 하는 날 부축하는 기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렇게 말한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내일부터 다시 운동 열심히 할 게요. 축구 잘 해서 엄마 꼭 호강시켜드릴 거예요. 그 약속 꼭 지킬게요.”
▲ 설기현 부부와 어머니 김영자 씨. | ||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아들 넷을 키운 일은 ‘힘들다’란 단어로 도저히 표현이 안 되는 그 이상의 어려움이 많았다. 다행히 기훈이 기현이 기만이 기호는 큰 말썽 부리지 않고 ‘알아서’ 잘 커줬다. 그중에서 막내 기호는 형인 기현이가 축구하는 걸 보며 자라서 그런지 축구공에 유난히 애착을 많이 느꼈다. 형처럼 축구 선수가 되어 공부 대신 운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집에 운동 선수는 한 명으로 족하다는 생각에 강하게 반대를 했었다.
지금은 직장 다니며 안산에서 조기 축구회 멤버로 열심히 뛰고 있는 기호가 하루는 이런 넋두리를 해댔다. “엄마가 날 축구 선수로 만들어줬다면 기현이 형보다 더 잘 할 수 있었다구. 축구 잘 해서 엄마를 돈 방석에 앉혀 놨을 텐데 왜 축구를 안 시켜줬어?”
만약에 두 아들이 축구선수였다면 난 아마 제 명대로 못 살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호한테는 미안하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아니 아버지라도 살아계셨다면 기호도 축구를 했을지 모른다. 이런 내용을 잘 알고 있는 기현이도 기호에게 항상 미안함을 갖고 있다.
남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때는 아들 넷이 내 인생의 ‘짐’이자 ‘숙제’였다. 그러나 지금 그 아들들은 내 인생의 ‘보석’으로 성장해줬다. 그중에서도 기현이는 내 삶의 희로애락 그 자체였다. 평생 어린 아이로만 여겨졌던 그 아들이 어느새 두 아이를 둔 아빠가 되었다. 이젠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로서의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나한테 아들은 아들일 뿐이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