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붙박이 주전은 없었다
▲ 지난 9일 FA컵 축구대회 레딩-번리의 경기 중 설기현. AP/연합뉴스 | ||
이 말이 아마도 설기현의 현재 마음가짐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을 것 같다. 2000년 유럽 진출 이후 6년 만에 꿈에 그리던 프리미어리거의 꿈을 이룬 설기현은 데뷔 초반 폭발적인 대활약을 펼치면서 프리미어리그 신입생인 레딩 돌풍의 핵으로 많은 각광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가 완전치 않은 허리와 작은 부상들, 빡빡한 일정 소화에서 오는 체력 저하 등으로 작년 말부터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슬럼프에 빠져있다.
최근 며칠 사이에 설기현의 에버턴 원정경기 엔트리 제외와 관련된 수많은 추측과 성급한 분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현상을 바라보면 한국 언론들의 조급함(?)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설기현의 인지도와 위상의 변화도 잘 알 수 있었다.
설기현은 지난 21일 오전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에서 후반 28분 교체 투입돼 20분가량 그라운드를 누볐다. 지난 12월 23일 첼시 원정전에서부터 프리미어리그 그라운드를 밟지 못하다 근 한 달 만에 돌아왔지만 기대했던 공격포인트는 올리지 못했다.
그동안 설기현이 벤치를 지킨 것은 르로이 리타가 12월 중반부터 갑자기 최고조의 컨디션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 글렌 리틀에게 오른쪽 윙 포지션을 맡기고 케빈 도일과 함께 최전방 공격수로 보직 변경했던 설기현의 득점포가 주춤하는 사이에 르로이 리타가 첼시-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웨스트햄의 세 게임 연속 골을 터트렸고, 리틀도 결정적인 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현재의 베스트 일레븐 자리를 꿰차게 됐다.
하지만 9개월에 걸친 기나긴 시즌 동안 일정한 경기력을 꾸준히 유지시켜야 하는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사실 ‘베스트 일레븐이 누구다’라고 정할 수가 없다. 아무리 베스트 일레븐을 미리 짜봤자 부상자도 나오고 일시적으로 페이스가 떨어지는 선수도 나오며 또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경기 출전이 불가능해지는 선수들도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레딩처럼 층이 엷은 선수단을 이끌고 프리미어리그에 살아남아야 하는 스티브 코펠 감독으로서는 팀 전체의 경기력 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현재 펄펄 날고 있는 르로이 리타의 경우 시즌 초반에는 후반 10분을 남겨놓고 투입되기 일쑤였고 리틀은 최고의 데뷔를 장식하고 있던 설기현에게 밀려 아예 출전 기회조차 못 얻었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지금 설기현의 모습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라고 판단해버리는 것은 매우 무의미한 일이다. 코펠 감독 입장에서도 시즌 초에 설기현이 잘 했다고 혹은 지금 글렌 리틀이 잘 한다고 어느 한 선수만 계속 선택할 수는 없다.
지난 에버튼 원정(1월 14일) 바로 전날 설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부를 주고 받다가 “리버풀 날씨가 어떠하느냐”고 물었더니 설기현은 “안 갔다”라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컨디션이 안 좋은 설기현을 코펠 감독이 아예 원정 엔트리에서 제외한 것이다. 때마침 이 날 골 결정 능력에 대해 심각하게 의문시되어왔던 맨유의 박지성이 시즌 첫 골을 터트리면서 두 태극전사의 희비가 완벽하게 교차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한국 언론들은 설기현의 엔트리 제외 이유에 대해서 갖가지 추측을 제기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점은 설기현 자신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는 팬과 언론들의 우려에 대해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팀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발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을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는 볼 수 없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한 자신을 탓할 수도 있고 자신을 엔트리에서 제외시킨 코펠 감독의 선택에 섭섭함을 느낄 수도 있다. ‘아쉬운가?’라는 질문에 ‘아니다’보다는 ‘그렇다’에 조금 더 가까운 심리 상태일 것이다. 그렇지만 올 시즌 레딩의 돌풍을 가능케 하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바로 팀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다. 전반기 한때 팀 순위가 UEFA컵 진출권인 6위까지 치솟은 적이 있는데 그 당시도 설기현은 “팀 동료들 중에 농담이라도 ‘유럽 대회에 나가자’라고 하는 선수가 없다. 우리의 목표는 리그 잔류다”라고 못 박았을 정도로 온 선수단이 ‘리그 잔류’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런던=홍재민 축구 전문 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