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랐던 ‘한국복싱 망신살’
지인진은 지난해 12월 17일 로돌포 로페스(23·멕시코)를 꺾고 일본 선수에게 억울하게 판정패하며 잃었던 챔피언 벨트를 되찾았다. 로페스는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강타자로 지인진은 정면 대결을 피하며 노련미를 바탕으로 완벽한 판정승을 이끌어냈다.
사실 챔프의 슬픔은 이 경기부터 시작이었다. 첫 번째는 가난. 2004년 세계챔피언이 됐지만 지인진은 아직 봉천동의 방 두 칸짜리 전셋집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챔피언을 한국으로 불러들이려면 많은 돈이 드는 까닭에 정작 자신의 대전료는 얼마 받지 못했다. 손에 쥔 것은 2000만 원 정도. 그래도 다시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돈 생각은 잊었다.
두 번째는 무관심. 프로복싱 노챔프 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열리는 세계타이틀매치였지만 지상파 방송사는 중계를 외면했다. 이기고 나니 스포츠뉴스의 작은 꼭지로 보도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신문 등 다른 언론들도 무관심은 마찬가지였다. 그럴 듯하게 챔프의 재탄생을 기사화했지만 내막까지 자세히 소개한 글은 없었다.
지인진은 이날 8라운드에서 주먹을 다쳤다. 상대를 때리다 왼 주먹에 골절상을 입었다. 상대가 눈치 채면 안 되는 까닭에 이를 감추며 주먹 하나로만 12회까지 버티며 승리를 따냈다. 자신보다 젊고 주먹도 강하고 체력이 뛰어난 챔피언. 여기에 한 손까지 골절을 당했는데 오직 노련미와 테크닉으로 이겨낸 것이다. 상대를 속이기 위해 왼손은 대충 휘둘렀고, 제대로 된 가격은 오른손으로만 했다. 따지고 보면 한국프로복싱사에 빛나는 명승부였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1월 10일 <파이트뉴스> 등 미국의 복싱 관련 인터넷 매체는 지인진이 오는 4월 28일 중국 마카오에서 WBC 슈퍼페더급 잠정 챔피언인 대니 파퀴아오와 타이틀 매치를 벌인다고 보도했다. 이는 후속 보도와 지인진의 프로모터인 이거성 PS프로모션 대표를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파퀴아오는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필리핀을 넘어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월드스타다. ‘팩맨’이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한 그는 경량급 세계 강자들을 모조리 꺾으며 명실상부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2006년 11월 모랄레스와의 3차전이 끝나고 귀국할 때 필리핀은 한국의 2002년 월드컵 열기를 능가하는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권위 있는 복싱 잡지 <링>이 2006년 ‘올해의 선수’로 선정하기도 했다. 파퀴아오는 현재 대전료만 100만~200만 달러를 받는다.
한국 프로복싱 사상 최대 이벤트로 기록될 이 경기에서 지인진은 1억 4000만 원의 대전료를 받기로 했다. 원정 경기의 경우 선수가 50%를 차지한다는 룰을 적용하면 대전료만 2억 8000만 원, 즉 30만 달러에 달한다(이런 경우 프로모터가 액수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기에 많게는 50만 달러까지 추정된다).
▲ 지난해 12월 17일 로페스와의 세계타이틀 매치. 공중파 TV가 외면할 만큼 주목받지 못했지만 한국 프로복싱사에 기록될 명승부였다. 연합뉴스 | ||
대결 성사는 한국 프로복싱의 영업력과 전혀 상관 없었다. 한국 프로복싱은 흥행력과 국제비즈니스에서 거의 사망 선고를 받은 상태다. 한국 측이 파퀴아오의 대결을 따낸 것이 아니라 파퀴아오가 골든보이프로모션(선수 겸 프로모터로 활약하고 있는 오스카 델라 호야가 대표)과 톱랭크프로모션(봅 애럼)과의 이중 계약으로 미국에서 경기가 어려워진 탓에 나온 부산물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소식도 국내 언론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부 복싱 마니아들의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실리는 데 그쳤다.
선수는 중요한 경기가 잡히면 더욱 열심히 하기 마련이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지인진은 모처럼 승부근성이 발동했다. 일찌감치 합숙훈련을 시작하며 ‘세기의 대결’ 준비에 돌입했다.
그런데 지난 2월 6일 날벼락이 떨어졌다. 봅 애럼이 4월 28일로 예정된 지인진-파퀴아오전을 2007년 가을까지 유보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유보한다고 했지만 열린다는 보장이 없다. 파퀴아오는 지인진 대신 4월 21일(또는 4월 14일) 미국 샌안토니오에서 다른 선수와 경기를 가질 것으로 알려졌다.
애럼은 대회 장소인 마카오에 가보지도 않은 채 지인진-파퀴아오전 전을 발표했고, 파퀴아오와 골든보이프로모션 측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그냥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린 것이다. 인기를 발판으로 필리핀 국회의원 출마를 노리는 파퀴아오는 가능한 빨리 경기를 치르고 5월 선거운동에 뛰어들고 싶어 한다는 후문이다. 또 골든보이프로모션 측이 방송사인 HBO를 압박해 중계를 취소하고 파퀴아오의 트레이너가 호야의 트레이너를 겸하는 등 상황이 복잡해지자 애럼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일방적으로 취소 결정을 내린 것이다.
지인진은 “황당하다. 국제적인 계약과 세부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가계약서에 사인까지 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데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라고 말했다. 모처럼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운동은 일단 접고 까다로운 지명 방어전이나 아니면 통합전 등 또 다른 메가파이트의 성사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지인진은 이미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쯤은 감수할 각오가 돼 있지만 최근 계속되는 내부의 무관심과 외부의 무시에는 크게 낙담하고 있다.
유병철 객원기자 einer6623@hotmail.com